태그 : 하늘

[Singapore Sling] Super Sampler

두 번째인 싱가폴 여행에 뭔가 재미를 더할 수 있을까 해서 생각한 것이 슈퍼 샘플러였다. 남미 이후 배신당한 심정으로 로모를 처박아둔 이후 필카 자체에 대한 흥미를 잃은 듯한 나였지만, 슈샘은 그야말로 장난감 삼아 들고가볼까 싶은 기분이 들더라. 나고야 때 함께 했던 파류양의 슈샘을 전날 첩보작전 펼치듯 얻어 들고, ISO100은 좀 불안하여 코닥400을 비싼 돈 주고 한 통 사서.
뷰파인더도 안 달려 있었고, 처음 써보는 거라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야 할지, 거리는 앵글은 폭은 어떻게 나올지 전혀 짐작하지 못한 채 필름을 돌렸다. 매일 가방에 들고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시내에 있을 때는 거의 잊고 있다가, 마지막 날 해변 공원에서 잔뜩. 뛰어다니는 어린애들이 좀 더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뭐 그 정도 욕심까지는.

돌아와서 남은 몇 장을 마저 찍고 현상하려는데 다 돌아갔나 싶어 카메라를 열었더니 필름이 한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있는 사태가 발생. 황급히 닫았으나 뭐 이런 일이!! 돈 들이고 품 들이고 간신히 스물 몇 장 찍어왔더니 빛까지 들어가는 것이냐 ㅠㅠ "날아갔을 텐데요..."하는 직원의 우려를 무시하고 현상해달라 했다. 의외로 한두 장 이외에는 보통 괜찮거든.
1시간을 기다려 인덱스를 받아들고 나오는데, 우왕 이쁘잖아!!! >ㅁ< 색감이나 빛이 퍼지는 모양 같은 게, 맨 처음 로모를 알게 되었을 때와 같은 감동으로 감탄하게 만들었다. (원래 인덱스의 축소버젼이 참 예뻐보이긴 한다) 실제 스캔은 오히려 이보다 떨어져서, 편집할 때는 인덱스의 색감을 참조해서 붉은 빛을 조정했다.
슈샘다운 역동감은 떨어지지만, 나름 흡족한 나의 첫 슈퍼샘플러 :)


by kisa | 2009/06/29 13:12 | I remember | 트랙백 | 덧글(2)

[Singapore Sling] 해가 지지 않는 바다

2009.06.10

우아한 클래식 음악에 깨는 마지막 아침. 첫날 사두었던 탐포포 델리의 밀크티 푸딩을 윤희와 나눠먹었다. "잘 다녀와." 그리고 나도 미뤄두었던 알바 일을 조금. 미리 짐을 챙겨두고, 보물상자 같은 윤희의 하드에서 이것저것 복사하다보니 시간이 제법 흘렀다. 자아, 마지막 코스를 돌아보자.

오늘은 이전에 갔던 코스를 되짚어 필요한 물건을 사고, 어제 놓쳤던 공원에 가는 일정, 단 거기서 나의 취미인 "직통 시내버스 악착같이 타기" 옵션이 붙는다. 사실 역까지 걸어가서 지하철을 타는 것보다 기본으로 20분은 날려먹는 것이 낯선 곳에서 버스 타기인데 어쩜 이게 그리 포기하기 어려운지.  어제 내렸던 정류장에서 열심히 노선도를 체크하고 있었다. 교통카드를 이용하는 거나 지하철에서 환승이 되는 것은 우리나라와 비슷하고 2층 버스가 멋지구리한 싱가폴 버스 시스템이건만 노선도 표시는 아주 엉망이다. 깨알 같은 글씨로 전체 노선이 아닌 현 정류장에서부터의 노선 정류장명, 번호 그리고 요금 구간이 표시되어 있는데, 정류장명이 완전히 암호 같다. 거리 이름을 중요 지명으로 사용하는 나라라는 것은 이해하지만, 무슨 거리 몇 블록째라고 써놓으면 이걸 어찌 가늠해야 하는지... 부에노스 아이레스만 해도 완전 격자무늬 거리에다가 번지수가 평행으로 일치하면서 m 단위까지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알기 쉬운데. 여기는 지하철 역 이름으로 대표되는 정류장명 찾기가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 그나마 한두 군데 정류장에서는 지하철 노선도처럼 위치가 보이는 주요 버스 노선도가 있어서 얼추 추리해본다. 만. 도저히 모르겠어 ㅠㅠ
내가 가려는 곳은 Clarke Quay야, 너네 나라에서 나름 주요 지점 아니냐고! 몇 분째 서성이는 나를 보다못한 아저씨 한 분이 "어디 가는겨?"라며 친절히 도움을 건네신다. "아, 나 거기 가는 버스 알아, 186번이야"라는 말과 정류장이 있는 방향을 세 번씩 반복하며 가르쳐주시기에 "땡큐베리마치!"하며 활짝 웃어보인다. 50m도 안 되는 짧은 거리를 헤매다가 마침 지나가는 186번을 보고 쫓아갔더니, 배차 간격이 10~21분이네 oTL 기다려서 실제 타고 간 거리는 5분이 과연 되었을까?;

2시가 넘어 힘겹게 도착한 Liang Court의 탐포포에서 돈코츠 국물의 흑돼지 샤브샤브 칠리 라멘을 먹는다. 오, 첫맛은 보통, 근데 한 숟갈 한 숟갈 먹어갈수록 더 땡기는 이 맛! 그러고보면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혼자 식사하는 거다. 사실 나한테 혼자 식사하기란 아주 자연스런 일인데. 지금까지 매끼 챙겨준 윤희에게 새삼 고마움을 ㅠㅠ 
이곳과 또 직통버스 한 건으로 가는 Great World City에서 옷도 좀 구경하고, 봐두었던 음식도 사고, MEIDI-YA슈퍼와 키노쿠니야 서점도 들렀다. 이 동네는 완전 일본타운에 가깝네. 양손에 비닐봉투를 들고 이걸 집에다 놓고 와? 고민하다가 눈앞에 지나가는 버스가 시내로 가기에 얼른 올라탔는데, 엇, 이거 내가 가려는 공원에 가는 거잖아? 약간 인도계의 아저씨가 "이거 오챠드 로드 가요 ^ㅁ^"하면서 나를 반겼는데 "혹시 East Coast Park도 가남요?"하고 되물었더니 "엉 물론이지. 도착하면 알려줄게용"하며 상냥하게 웃어주는 기사님. 아아 정말 친절한 미소는 여행의 활력소야. 화려번쩍한 백화점 거리 Orchard Road를 뚫고 해변으로 달리는 버스, 그리고 바깥 풍경을 보며 즐거워하다가 어느덧 꾸벅꾸벅 조는 나.

한 40분 지났을까? 눈을 들어 보니 기사님이 손을 흔들어 나를 부른다. "공원 가는 방법 알아요?" "아뇨 모르는데" "내리면 파란 간판이 있어요. 그걸 따라 가면 지하도가 있거든. 그리로 내려가면 공원이 나와요" 하고 운전하면서도 친절히 가르쳐주시는 기사님! 다시 한 번 땡큐베리마치! 그렇게 도착한 East Coast Park는 누가 올린 해변 사진을 보고 한 번 가야지, 하고 생각한 곳인데, 올루는 해산물 먹으러밖에 안 가봤다고 했다. 사실 고즈넉한 해변을 기대했던 나, 가보니 벅쩍한 공원에 가깝다. 모래사장은 특이한 해안작용으로 형성되었다고 하여 좁다랗고 조심하라는 빨간 줄이 쳐져 있다. 해안선을 따라 오래되고 높다란 나무가 나름 울창하게 줄지어 있어 대부분 자전거를 빌려타거나 인라인 스케이트를 즐긴다. 또 몇십 개의 바베큐 시설이 설치되어 가족이나 친구들끼리 고기를 싸들고 나와 숯불에 구워먹는 모습이 그야말로 연기 나는 진풍경! 바다 너머에는 커다란 컨테이너 선박만 늘어서 있어 그다지 감수성 넘치는 풍경은 아니었건만, 그럼에도 바삭한 느낌으로 부서지는 파도 소리와 짭짤한 산들바람이 바닷가에 왔다는 느낌을 만끽하게 해주었다. "바다에 가자!"라고 작정하고 도시를 탈출해서가 아니라, 그냥 장 보고 와서 살살 거닐다 가는 그런 느낌의 바다가, 조금 부러웠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연안 공원을 양손에 비닐봉다리 낀 채로 걸으며 열심히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시침 뚝 떼고 슈퍼샘플러를 들이댔다. 사실 야경 대신 멋진 노을을 보려던 내 작정은 완전히 실패였다. 여긴 이스트 코스트 파크잖아!! =ㅅ=;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져서야 나타난 수산센터 앞에서 대체 어떻게 하면 도심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고심하고 있던 차에 윤희한테서 전화가 왔다. "오늘 하루 어떻게 지냈어?" "오늘 밤은 역시 Esplanade에서 No Signboard?" 약속을 확인하고 룰루랄라. 이곳은 외진 곳이라 대중교통이 있는 곳까지 가려면 다른 곳의 셔틀버스를 얻어타야 하는데, 수줍게 공짜냐고 묻자 "오케이, 노 프라블람."하며 싱끗 웃어주는 기사 총각. 내려서 뭘 타야하는지 친절히 가르쳐주었건만 나는 내려서 어제의 그 버스를 발견하고 다시 잡아 탔다. 오늘밤은 불안해 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데서 정확히 내릴 수 있어!

지금까지 먹은 것 중에 가장 맛있었던 거를 다시 먹자-라는 취지 하에 고른 No Signboard. 물론 칠리크랩을 다시 먹지는 못하고 황홀하게 맛있었던 볶음밥만 간단한 요리와 함께 시켰다. 점심 때는 너무나 바빠서 빵을 사다먹었다는 윤희는 이내 숟갈을 내려놓았지만, 조용히 꾸준하게 마지막 밥 한 톨까지 싹싹 긁어먹는 나. 어때, 뿌듯하지?

마지막 싱가폴 달러를 털 장소로 커피가 맛있다는 SPINNELI를 찾아헤매었건만, 집앞의 가게는 무려 7시30분에 폐점하였고, 다른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왜, 안 찾아질수록 욕구가 더 강해지는 거 있지 않나. 내가 이 더위에 땀을 흘리며 돌아다니는데 반드시 진한 아이스 카페모카 한 잔 쭉쭉 빨아먹어주고 말겠다는 집념이 불타오른다. 원래는 얼른 집에 들어가 샤워하고 파일도 마저 복사하고 시간 남으면 알바도 더 해두려고 했는데. 밤 9시에 무려 40분쯤을 헤매었던 것 같다. 그냥 tcc에 가? 아냐, 한 번 마신 곳에 다시 갈 순 없어! 그러다 발견한 SPINNELI의 간판! 하지만 이곳도 문이 닫혀 있었고 ㅠㅠ 결국 그 옆의 Tully's에 들어가 한 잔을 시켰다. 한국에 입점했다가 철수한 Tully's. 마셔봤었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그래도 이젠 마실 수 없는 곳이니까. 무척 다행하게도, 커피는 기대만큼 진하고 맛있었다. 그 잠깐 에어컨 바람에 나 자신의 집념을 날려주며 휴식. 그리고는 인사로 배웅하는 스텝에게 다가가 말한다. "To be honest, I'm totally lost. 지금 여기가 대체 어디니?" 지도를 보여주며 간신히 방향을 찾아 되돌아온 나. 그런 정신머리로 급하게 짐을 정리하고 공항에 도착해보니 기념품 대신 싹쓸이 해온 나의 순애보 초콜렛 Chrunchies를 전부 윤희네 냉장고에 두고 왔다. 윤희야, 우리 보름 뒤에 만나.


사실은 아까 그 바다를 바라보고 필사적으로 노을로 물든 하늘을 찾아걷다가, 바다내음 가득한 바람을 맞으며 잠시 벤치에 앉아 편지를 썼다. 윤희에게. 나 솔직히 말할까? 말해버려도 될까? 나 사실은 부러웠다? 올루랑 너랑 셋이서 식사하면서.
걔가 의아해 했지. 어떻게 네 제일 친한 친구랑 또 다른 친구랑 서로 모르는 사이일 수가 있냐고. 우린 말했어, 한국 사람들은 그닥 친구를 섞지 않는다고. 무작위의 파티 같은 걸 여는 문화도 아니니까. 그러면서 이제는 우리가 서로 아는 사이가 됐으니까 그런 담을 뚫었다고 웃으며 이야기했지. 물론 새로운 사람, 그것도 네가 이곳에서 즐겁게 지낼 수 있는 이유가 되어주는 좋은 친구를 소개받고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서 좋았지만, 얼마 안 지나 질투하게 되더라. 나는 그렇게 노력해도 얻지 못한 것, 올루는 너의 옆자리에 그리도 쉽게 존재한다는 것이. 두 사람이 영어로, 내가 평소 듣지 못했던 장난스런 말투로 이야기 나누는 동안, 나는 그런 부러움을 느끼고 있었어.

생각해보면 20년 간 주욱 그런 결핍의 감정이 아니었을까? 왜 우린 함께 일상을 지내지 못하는 걸까, 왜 항상 이렇게 시간에 쫓기는 걸까. 그러면서 스스로 선을 긋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루지 못할 것을 이상으로 삼은 채, 부족한 것만을 탓해 온 것이 아닐까. 이 상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만남을 갖고 짧은 문자를 주고 받는 그 순간 하나하나도 다 행복 그 자체로 쌓아올릴 수 있을 텐데.
너를 인생의 다른 스테이지로 올려보내는 이 시기에 이르러서야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나는 참 어리다는 생각을 하며, 너를 보면 내가 항상 부끄럽고 그래서 더더욱 네가 좋다는 그런 생각을 하며, 좁지만 아득한 싱가폴의 해안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또또 혼자 분위기 잡고 오버한다고? 맞아, 내가 늘 그렇잖아. 그래도 꾸밈 없는 감정을 실어 이야기한다. 이번 여행, 정말 좋았어. 너와 나란히 누워 잠들고, 또 하루를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시간. 처음이냐 마지막이냐 이런 거 따지지 않고, 그 자체로 행복했어.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지게 된 것 진심으로 축하해. 각자 어디에 있든, 늘 마음만은 함께. 사랑해 친구야.

by kisa | 2009/06/21 20:34 | I remember | 트랙백 | 덧글(2)

[일기] 20090614004419

-.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을 정도. 그것은 굳이 방황이나 도피나 탈선이나 타락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심한 정도의 방만으로 나타난다. 이제껏 없었던, 괴로움이 아닌 무기력.
-. 이번에는 답을 찾아내는 일이 굉장히 오래 걸렸다. 나디아의 주문을 오래 잊고 살았던 것 같다. 아직 완전히 깨어나진 못했다. 그래도 조금씩 허리를 곧추세우고 있다.
-. 요 며칠 간 하늘이 너무 아름다웠다. 뿌옇고 하얗기만 한 서울의 하늘이 너무나 싫고 답답하고 숨이 막힐 것만 같았는데. 최근 며칠, 눈이 부시게 새파랗진 않지만 어딘가 보드랍고 누군가의 섬세한 붓놀림과도 같았던 어여쁜 구름 무늬의 하늘이, 오랫동안 무뎌져 있었던 가슴을 살짝 뭉클하게 했다. 아직, 하늘을 바라보고 웃을 수 있다.
-. 핑계를 대는 데 질렸다. 더 이상 피해자 행세를 하기 싫다. 노력하고 땀 흘리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하나가 어긋나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이 삐걱대기 시작했었다. 아직 진동은 가라앉지 않았지만, 이제부터라도 조금 고쳐나갈 수 있을까.
-. 너무 까칠하고 어둡기만 해서 차라리 보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말까지 했다. 그럼에도 만나고 붙잡고 있는 건 내가 유약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간 나의 한숨에 덩달아 우울해졌던 친우들께 미안함과 고마움을 함께.
-. 산뜻하게 살고 싶다. 하면 돼. 안 하면 돼. 스스로를 죄이고 있는 쇠사슬 같은 거 없애버리고. 응, 그렇게 하자.

by kisa | 2009/06/14 00:54 | I am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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