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윤희

[Singapore Sling] 해가 지지 않는 바다

2009.06.10

우아한 클래식 음악에 깨는 마지막 아침. 첫날 사두었던 탐포포 델리의 밀크티 푸딩을 윤희와 나눠먹었다. "잘 다녀와." 그리고 나도 미뤄두었던 알바 일을 조금. 미리 짐을 챙겨두고, 보물상자 같은 윤희의 하드에서 이것저것 복사하다보니 시간이 제법 흘렀다. 자아, 마지막 코스를 돌아보자.

오늘은 이전에 갔던 코스를 되짚어 필요한 물건을 사고, 어제 놓쳤던 공원에 가는 일정, 단 거기서 나의 취미인 "직통 시내버스 악착같이 타기" 옵션이 붙는다. 사실 역까지 걸어가서 지하철을 타는 것보다 기본으로 20분은 날려먹는 것이 낯선 곳에서 버스 타기인데 어쩜 이게 그리 포기하기 어려운지.  어제 내렸던 정류장에서 열심히 노선도를 체크하고 있었다. 교통카드를 이용하는 거나 지하철에서 환승이 되는 것은 우리나라와 비슷하고 2층 버스가 멋지구리한 싱가폴 버스 시스템이건만 노선도 표시는 아주 엉망이다. 깨알 같은 글씨로 전체 노선이 아닌 현 정류장에서부터의 노선 정류장명, 번호 그리고 요금 구간이 표시되어 있는데, 정류장명이 완전히 암호 같다. 거리 이름을 중요 지명으로 사용하는 나라라는 것은 이해하지만, 무슨 거리 몇 블록째라고 써놓으면 이걸 어찌 가늠해야 하는지... 부에노스 아이레스만 해도 완전 격자무늬 거리에다가 번지수가 평행으로 일치하면서 m 단위까지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알기 쉬운데. 여기는 지하철 역 이름으로 대표되는 정류장명 찾기가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 그나마 한두 군데 정류장에서는 지하철 노선도처럼 위치가 보이는 주요 버스 노선도가 있어서 얼추 추리해본다. 만. 도저히 모르겠어 ㅠㅠ
내가 가려는 곳은 Clarke Quay야, 너네 나라에서 나름 주요 지점 아니냐고! 몇 분째 서성이는 나를 보다못한 아저씨 한 분이 "어디 가는겨?"라며 친절히 도움을 건네신다. "아, 나 거기 가는 버스 알아, 186번이야"라는 말과 정류장이 있는 방향을 세 번씩 반복하며 가르쳐주시기에 "땡큐베리마치!"하며 활짝 웃어보인다. 50m도 안 되는 짧은 거리를 헤매다가 마침 지나가는 186번을 보고 쫓아갔더니, 배차 간격이 10~21분이네 oTL 기다려서 실제 타고 간 거리는 5분이 과연 되었을까?;

2시가 넘어 힘겹게 도착한 Liang Court의 탐포포에서 돈코츠 국물의 흑돼지 샤브샤브 칠리 라멘을 먹는다. 오, 첫맛은 보통, 근데 한 숟갈 한 숟갈 먹어갈수록 더 땡기는 이 맛! 그러고보면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혼자 식사하는 거다. 사실 나한테 혼자 식사하기란 아주 자연스런 일인데. 지금까지 매끼 챙겨준 윤희에게 새삼 고마움을 ㅠㅠ 
이곳과 또 직통버스 한 건으로 가는 Great World City에서 옷도 좀 구경하고, 봐두었던 음식도 사고, MEIDI-YA슈퍼와 키노쿠니야 서점도 들렀다. 이 동네는 완전 일본타운에 가깝네. 양손에 비닐봉투를 들고 이걸 집에다 놓고 와? 고민하다가 눈앞에 지나가는 버스가 시내로 가기에 얼른 올라탔는데, 엇, 이거 내가 가려는 공원에 가는 거잖아? 약간 인도계의 아저씨가 "이거 오챠드 로드 가요 ^ㅁ^"하면서 나를 반겼는데 "혹시 East Coast Park도 가남요?"하고 되물었더니 "엉 물론이지. 도착하면 알려줄게용"하며 상냥하게 웃어주는 기사님. 아아 정말 친절한 미소는 여행의 활력소야. 화려번쩍한 백화점 거리 Orchard Road를 뚫고 해변으로 달리는 버스, 그리고 바깥 풍경을 보며 즐거워하다가 어느덧 꾸벅꾸벅 조는 나.

한 40분 지났을까? 눈을 들어 보니 기사님이 손을 흔들어 나를 부른다. "공원 가는 방법 알아요?" "아뇨 모르는데" "내리면 파란 간판이 있어요. 그걸 따라 가면 지하도가 있거든. 그리로 내려가면 공원이 나와요" 하고 운전하면서도 친절히 가르쳐주시는 기사님! 다시 한 번 땡큐베리마치! 그렇게 도착한 East Coast Park는 누가 올린 해변 사진을 보고 한 번 가야지, 하고 생각한 곳인데, 올루는 해산물 먹으러밖에 안 가봤다고 했다. 사실 고즈넉한 해변을 기대했던 나, 가보니 벅쩍한 공원에 가깝다. 모래사장은 특이한 해안작용으로 형성되었다고 하여 좁다랗고 조심하라는 빨간 줄이 쳐져 있다. 해안선을 따라 오래되고 높다란 나무가 나름 울창하게 줄지어 있어 대부분 자전거를 빌려타거나 인라인 스케이트를 즐긴다. 또 몇십 개의 바베큐 시설이 설치되어 가족이나 친구들끼리 고기를 싸들고 나와 숯불에 구워먹는 모습이 그야말로 연기 나는 진풍경! 바다 너머에는 커다란 컨테이너 선박만 늘어서 있어 그다지 감수성 넘치는 풍경은 아니었건만, 그럼에도 바삭한 느낌으로 부서지는 파도 소리와 짭짤한 산들바람이 바닷가에 왔다는 느낌을 만끽하게 해주었다. "바다에 가자!"라고 작정하고 도시를 탈출해서가 아니라, 그냥 장 보고 와서 살살 거닐다 가는 그런 느낌의 바다가, 조금 부러웠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연안 공원을 양손에 비닐봉다리 낀 채로 걸으며 열심히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시침 뚝 떼고 슈퍼샘플러를 들이댔다. 사실 야경 대신 멋진 노을을 보려던 내 작정은 완전히 실패였다. 여긴 이스트 코스트 파크잖아!! =ㅅ=;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져서야 나타난 수산센터 앞에서 대체 어떻게 하면 도심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고심하고 있던 차에 윤희한테서 전화가 왔다. "오늘 하루 어떻게 지냈어?" "오늘 밤은 역시 Esplanade에서 No Signboard?" 약속을 확인하고 룰루랄라. 이곳은 외진 곳이라 대중교통이 있는 곳까지 가려면 다른 곳의 셔틀버스를 얻어타야 하는데, 수줍게 공짜냐고 묻자 "오케이, 노 프라블람."하며 싱끗 웃어주는 기사 총각. 내려서 뭘 타야하는지 친절히 가르쳐주었건만 나는 내려서 어제의 그 버스를 발견하고 다시 잡아 탔다. 오늘밤은 불안해 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데서 정확히 내릴 수 있어!

지금까지 먹은 것 중에 가장 맛있었던 거를 다시 먹자-라는 취지 하에 고른 No Signboard. 물론 칠리크랩을 다시 먹지는 못하고 황홀하게 맛있었던 볶음밥만 간단한 요리와 함께 시켰다. 점심 때는 너무나 바빠서 빵을 사다먹었다는 윤희는 이내 숟갈을 내려놓았지만, 조용히 꾸준하게 마지막 밥 한 톨까지 싹싹 긁어먹는 나. 어때, 뿌듯하지?

마지막 싱가폴 달러를 털 장소로 커피가 맛있다는 SPINNELI를 찾아헤매었건만, 집앞의 가게는 무려 7시30분에 폐점하였고, 다른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왜, 안 찾아질수록 욕구가 더 강해지는 거 있지 않나. 내가 이 더위에 땀을 흘리며 돌아다니는데 반드시 진한 아이스 카페모카 한 잔 쭉쭉 빨아먹어주고 말겠다는 집념이 불타오른다. 원래는 얼른 집에 들어가 샤워하고 파일도 마저 복사하고 시간 남으면 알바도 더 해두려고 했는데. 밤 9시에 무려 40분쯤을 헤매었던 것 같다. 그냥 tcc에 가? 아냐, 한 번 마신 곳에 다시 갈 순 없어! 그러다 발견한 SPINNELI의 간판! 하지만 이곳도 문이 닫혀 있었고 ㅠㅠ 결국 그 옆의 Tully's에 들어가 한 잔을 시켰다. 한국에 입점했다가 철수한 Tully's. 마셔봤었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그래도 이젠 마실 수 없는 곳이니까. 무척 다행하게도, 커피는 기대만큼 진하고 맛있었다. 그 잠깐 에어컨 바람에 나 자신의 집념을 날려주며 휴식. 그리고는 인사로 배웅하는 스텝에게 다가가 말한다. "To be honest, I'm totally lost. 지금 여기가 대체 어디니?" 지도를 보여주며 간신히 방향을 찾아 되돌아온 나. 그런 정신머리로 급하게 짐을 정리하고 공항에 도착해보니 기념품 대신 싹쓸이 해온 나의 순애보 초콜렛 Chrunchies를 전부 윤희네 냉장고에 두고 왔다. 윤희야, 우리 보름 뒤에 만나.


사실은 아까 그 바다를 바라보고 필사적으로 노을로 물든 하늘을 찾아걷다가, 바다내음 가득한 바람을 맞으며 잠시 벤치에 앉아 편지를 썼다. 윤희에게. 나 솔직히 말할까? 말해버려도 될까? 나 사실은 부러웠다? 올루랑 너랑 셋이서 식사하면서.
걔가 의아해 했지. 어떻게 네 제일 친한 친구랑 또 다른 친구랑 서로 모르는 사이일 수가 있냐고. 우린 말했어, 한국 사람들은 그닥 친구를 섞지 않는다고. 무작위의 파티 같은 걸 여는 문화도 아니니까. 그러면서 이제는 우리가 서로 아는 사이가 됐으니까 그런 담을 뚫었다고 웃으며 이야기했지. 물론 새로운 사람, 그것도 네가 이곳에서 즐겁게 지낼 수 있는 이유가 되어주는 좋은 친구를 소개받고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서 좋았지만, 얼마 안 지나 질투하게 되더라. 나는 그렇게 노력해도 얻지 못한 것, 올루는 너의 옆자리에 그리도 쉽게 존재한다는 것이. 두 사람이 영어로, 내가 평소 듣지 못했던 장난스런 말투로 이야기 나누는 동안, 나는 그런 부러움을 느끼고 있었어.

생각해보면 20년 간 주욱 그런 결핍의 감정이 아니었을까? 왜 우린 함께 일상을 지내지 못하는 걸까, 왜 항상 이렇게 시간에 쫓기는 걸까. 그러면서 스스로 선을 긋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루지 못할 것을 이상으로 삼은 채, 부족한 것만을 탓해 온 것이 아닐까. 이 상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만남을 갖고 짧은 문자를 주고 받는 그 순간 하나하나도 다 행복 그 자체로 쌓아올릴 수 있을 텐데.
너를 인생의 다른 스테이지로 올려보내는 이 시기에 이르러서야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나는 참 어리다는 생각을 하며, 너를 보면 내가 항상 부끄럽고 그래서 더더욱 네가 좋다는 그런 생각을 하며, 좁지만 아득한 싱가폴의 해안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또또 혼자 분위기 잡고 오버한다고? 맞아, 내가 늘 그렇잖아. 그래도 꾸밈 없는 감정을 실어 이야기한다. 이번 여행, 정말 좋았어. 너와 나란히 누워 잠들고, 또 하루를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시간. 처음이냐 마지막이냐 이런 거 따지지 않고, 그 자체로 행복했어.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지게 된 것 진심으로 축하해. 각자 어디에 있든, 늘 마음만은 함께. 사랑해 친구야.

by kisa | 2009/06/21 20:34 | I remember | 트랙백 | 덧글(2)

[Singapore Sling] Friday night Hen party

아아, 공항에 아슬아슬 도착하길 좋아하면서 자리는 또 고르는 내게 이제 웹체크인이란 필수로구나. 급 생각이 나서 항공사 홈페이지에 접속해보니 이미 많은 자리가 꽉 차 있었다. 내가 자동으로 배정된 곳은 3등분의 맨앞쪽의 맨뒷좌석. 다른 좌석은 3-3-3배열인데 이곳만 두 자리가 나란히 있다. 비행기 날개 바로 옆이라는 게 좀 아숩지만 바꾸지 않고 그대로 앉기로 한다.

공항에 1시간 20분 전에 도착, 웹체크인 전용 카운터에서 보딩패스 확인을 받고(내가 출력해간 A4용지에 그대로 도장을 찍어준다. 공교롭게도 린젤북 오탈자 체크용 이면지였....) 로밍을 하고 면세품을 받고 새로 생긴 탑승동까지 셔틀을 타고 고고씽. (로밍은 Skype가 새로 생기면서 임대료가 무료길래 예약해둔 걸 날려버리고 여기서 대여!) 탑승 개시했는데 최근의 지름 로망이었던 손목시계까지 하나 사고 게이트로 달려갔다. 헙, 서두르느라 손목 체인 줄이는 걸 깜빡했네 ㅠㅠ

옆자리는 중년의 싱가폴 아저씨였다. "Are you going home?"하며 내가 동향 사람인 줄 아는데 이거 살짝 맘 상해해도 괜찮을까? -_-; 발음이 좀 알아듣기 어렵지만 말 걸기 그리고 설명해주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좀 말동무가 되어드리다가 이내 부족했던 잠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담요 덮고 허리에는 베개 두 개 그리고 트래블메이트 목 베개까지 완비! 배도 고파서 괴로웠는데 6시간반 비행에 브런치 하나밖에 안 주다니 ㅠㅠ (사실 첨엔 무려 메뉴판까지 나눠주길래 반갑게 받아들고 아침, 브런치가 나와있길래 살짝 착각했다. 아침은 귀국편용... ㅠㅠ) 그래도 홍콩 이후 처음으로 비행기에서 아이스크림을 준다! 하고 하겐다즈를 또 기대했더니 끌레도르였... (사실 맛은 비교가 안 되자나용) 결국은 도착하기 30분 전 "저도 저 컵라면 하나 먹을 수 있나요?"하고 나마저도 한국인 스튜어디스 언니를 싱가폴 사람으로 착각해 영어로 부탁해서 농심 김치찌개 큰사발면을 후루룩 쩝쩝 먹었는데 아 진짜 맛없었....


왜인지 공항에만 오면 능숙한 여행자가 되고 싶은 나. 방향도 헷갈리지 않길 원하고 뭐든지 짧은 줄에서 척척 앞으로 나아가길 원하고 잠시라도 멈춰서거나 간판을 살피거나 물어보거나 지체하지 않고 당당하게 도시행 셔틀버스까지 탑승하길 바라지. 하지만 뭐하러? 줄 서기 싫어서 짐도 안 부치고 앞쪽에 앉아 왔건만 끙, 하강 전에 화장실 들어가 썬블럭 바르는 걸 잊었다. 사실 어차피 급할 건 하나 없는데. 다른 나라 공항에 와서, 여기저기 두리번거리고, 이것저것 신기해 하고 요리갔다 조리갔다 "와아~"하면서 즐거워하면 그것도 재미가 아니리. 완전한 여행자 모드로 공항서부터 멈춰서서 이것저것 사진을 찍고 표지판도 구경하고 가게도 구경하고, 지하철 시스템도 신기해하면서(최근 도입된 우리나라의 1회용 승차권 보증금제와 같다) city행 MRT에 올라탔다. 고고!


...였는데 바로 두 번째 역에서 갈아타야했고 -_-; 옥외 정류장에 나서자마자 훅- 하고 폐를 채우는 뜨거운 공기. 우와, 숨 쉬기 무거울 정도로 습기가 장난이 아니야. 대체 내가 이 날씨의 싱가폴에 왜 왔더라?!; 하는 후회가 한순간 밀려들었다가 빠져나갔다. City Hall역에서 로밍폰 개시. "자기야~ 나 다음에 내려★" Raffles Place에서 반년만에 그녀를 만났다. 윤희는 함께 있던 나이지리아-영국 출신 친구 Olu(올루)를 소개시켜줬다. 큰 키의 시원시원한 흑인 아가씨 Olu는, 금세 그 통통 튀는 캐릭터가 느껴지는 친구였다. 같이 Booster 쥬스를 사러 가는데, "Bana~na"를 발음하는 모습에서 영국 냄새가 물씬 나더라 ㅎㅎ 다음주에 런던에 돌아갔다고 아주 신나 있는 Olu.


우선은 회사와 아주 가까운 윤희네 집에 들러서 쉬다가 저녁 때 또다른 인도 친구 Nikita와 넷이서 인도 음식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그 후에는 몇몇이 모여 자그맣게 결혼축하파티를 할 것 같다고 해서, 평소 자주 접해볼 일 없는 만남에 대한 기대에 두근두근! 짐을 풀고 나서 혼자 Raffles Quay에서 Boat Quay로 이어지는 길을 구경하며 Singapore River로 향했다. 굳이굳이 비교하자면 여의도 같은 도심 한복판에 건물들이 하나같이 예술이다. 솔직히, 열심히 한다고 장하다고 토닥거렸던 서울의 '세계디자인수도' 캠페인이 너무 부끄러울 정도다. 이렇게 자유롭고 조화롭고 창조적인 건축물이 널려 있는데. 빌딩은 물론 가게 하나하나가 프랜차이즈가 아니면서 간판이며 실내장식이며 메뉴며 훌륭한 디자인 컨셉을 지니고 있고, 그런 건축물이 조화된 길거리도 마찬가지다. 지하로 지하로 통하는 단순한 통로조차도 뭔가 특색이 가미되어 있다. 어느 것 하나 그냥 놔두지 않았으면서 과하지도 않다. 그렇게 스쳐지나가는 사이에 내 안으로 난입해 들어오는 이미지로 가득차, 거리를 그냥 걸어다닌 것만으로 미술관을 몇 개씩 관람한 기분이다. 건축테마투어를 한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흥미는 있었지만 실제 그걸 목적으로 해본 적은 없었는데, 진지하게 그쪽을 파고들어볼까 고민하게 된다.


붐비는 프라이데이 나잇 퇴근길, 윤희와 Olu와 조인해 Nikita까지 픽업해서 향한 곳은 인도 음식점 Vansh. 미국 영화에서나 보던 모던하면서 화려한 붉은 빛 인테리어의 가게에 안내를 받아 들어가는데...
"Surprise~!!"
10명쯤 되는 여자들이 모여앉아 윤희를 반기는 게 아닌가. 알고보니 Olu가 열심히 준비한 Hen Party(총각파티 같은)의 1차전이었던 것이다. 물론 친한 친구들도 있지만, 적당히 어울려 지내는 회사의 동료들이 모두 함께 모여 순수한 마음으로 결혼을 축하하는 이런 파티 같은 것. 정말 색다른 느낌. 주말에 늦잠 자다 성가셔 하며 일어나 봉투와 청첩장을 챙겨들고 가서 주례는 듣지 않은 채 방명록 적고 식당에 가는 문화와는 사뭇 다른 느낌. 모두들 조용한 캐릭터인 윤희가 결혼한다는 소식에 놀라 남편될 사람에 대해서 물어보고 결혼 계획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하는데, 청문회 같은 분위기를 방지하기 위해 Olu가 나서서 대변인처럼 답변하고 분위기를 밝게 조율한다. 그냥 웃고 떠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연락을 돌리고 장소를 셋팅하고 주문을 조절하고 다음 장소 컨펌을 하면서 대화까지 이끌어나간다는 게, 얼마나 윤희를 아끼는지 느낄 수 있어서 참 내가 다 뿌듯했다고나. 사실 나는 열심히 듣기만 하면서 온갖 종류의 인도 음식(이름은 아는 건 사모사뿐, 각종 감자, 두부, 양파 에피타이저와 생선, 새우, 양고기 구이에 버터 치킨, 버섯 카레, 내가 먹어본 중에 제일 맛있는 팔락 파니르, 게다가 난도 두세 종류.)을 종류별로 섭렵하는 데만 열중해 있었지만 말이다. 나중에는 Olu가 "그만 좀 먹어! 술 마실 배도 남겨놔야지!"하며 타박을 해올 정도였다.

그렇다, 2차는 술집. 혹시나 하는 우려(라고 쓰고 기대라고 읽는다)와는 달리 스트립퍼가 등장하진 않았지만, Howl at the Moon이라는 바의 한쪽 오픈된 룸에 핑크색 플라멩코를 세워두고 윤희의 머리위에 티아라를 얹고 모두 자리를 잡았다. 앞쪽 스테이지에서는 끊임없이 잘 알려진 노래들이 흘러나왔...다기보다 터져나왔는데, 보통 생음악이라고 하면 뭐 그냥 앞에서 자기들끼리 연주하고 손님은 자기들끼리 즐기고 그런 게 아니라 완전히 관객과 하나되어 분위기가 넘실대는 그런 느낌? 그냥 밴드도 아니고, 연주하는 곡마다 트럼펫, 클라리넷, 플룻 등 다양한 악기가 번갈아가며 등장해 곡을 완전히 생생하게 살려내는, 그런 편곡이 무척이나 흥겨웠다. 보드카 샷과 칵테일을 돌리고, 소리 높여 노래 부르고,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그런 파티. 잠시 앉아 페루 출신의 파울라와 리마 얘기도 하고, 술을 마시지 않는 얌전한 주부 Nikita와 짧은 몇 마디를 나누기도 하다가(인도식 발음 정말 못 알아듣겠;) 또 스테이지에 나가 주인공 윤희를 가운데에 두고 일렬로 어깨동무하여 캉캉을 추는, 그런 비눗방울이 팡팡 터져나가는 듯한 신나는 밤. 정말 우연히 마주친 윤희의 거래처 사람이(무척 잘생긴 서양인으로, 오늘'도' 부인이 아닌 여자를 양쪽에 끼고 있었다고 한다) 샴페인도 보내오고, 나는 이 들뜬 기분을 떠나보내지 않기 위해 안 마시던 술을 계속 홀짝이며 어깨를 들썩였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리 늦지 않은 시간 직장인 모두가 지쳐 파하고 나오는데, 올루와 윤희의 눈이 번뜩이며 마주친다. "춤출까?" "그래!" 넘치는 에너지, 한껏 달아오른 분위기, 다시 돌아오지 않을 그녀들의 프라이데이 나잇. 우리 셋은 Clarke Quay로 향해 클럽 Attica에 들어갔다. "돈을 내는 한이 있더라도 줄을 서서 들어갈 순 없지!" 역시나 지난 번의 안면으로 긴 줄을 피해 옆구리로 샥 들어가는 올루와 우리들. 꽉 들어찬 클럽은 어디에 뭐가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지만 우린 한쪽에 몸을 우겨넣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윤희의 18번 중 하나인 Cranberries의 ZOMBIE에 맞춰 몸을 흔들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나풀거리는 치마에 공간을 가득 메운 드라이아이스에 사람들의 열기에 땀은 흐르고 몸은 움직이고 정신은 취하고. 움직임 앞에 오로지 나와 음악만 있고, 내 앞에 있는 사람과만 눈빛을 마주치고 흐름을 타는. 내게 전에 없었던 프라이데이 나잇, 싱가폴에서의 첫 날 밤.

by kisa | 2009/06/05 15:48 | I remember | 트랙백 | 덧글(2)

[Singapore Sling] 그녀에게

윤희가 결혼한다.
우와, 이토록 상상해본 적 없는 일이.
그것은, 그녀가 결혼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기보다는
순수하게 그녀의 결혼한 모습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는 쪽에 가깝다.
22년 가까운 세월을 사귀어오면서
다른 친구들과는 가끔 하는 "우리가 결혼하면 비슷한 동네에서"이라는 가정을 입에 올려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어쩌면 우리의 관계는 구체적인 미래를 상정하지 않는 것이 기본일지 모른다.
7살의 나이에 만나서 3년이 채 못 되는 시간을 함께 했다. 그 후로는 쭉 떨어져 지냈다.
나는 한국, 그녀는 영국, 나는 서울, 그녀는 일산, 그리고 또 그녀는 미국, 또 대전, 또 수원, 또 싱가폴.
간신히 1년에 한두 번 두어 시간씩 만나며 언제나 한결같이 마음이 통함에 반가웠고
변화를 겪어본 일이 없기에 변화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그러나 가까운 미래에 대한 약속 혹은 가정조차 설 수 없었던 커다란 흐름과도 같은 관계.

그런 그녀가 결혼을 한다니, 인생의 다른 기로로 접어든다니.
안 그래도 멀리 있어서 나랑 만나줄 시간이 없는 애가 원거리결혼으로 인해 더 바빠진다니! =ㅅ=;;
인생이 원거리인 아가씨, 부모님과도 떨어져 살더니 남편이랑도 떨어져 산단다.
결혼식 일주일 전에 한국 와서 결혼식 치르고 이틀 뒤 델룽 귀국한다니 뭥미?
그렇게 바빠가지고는 신랑을 미리 만날 시간은 물론 결혼식장 들어서기 전에 얼굴 볼 시간도 없겠잖아!

그래서,
싱가폴에 가기로 했다.
그녀가 올 시간이 없으면,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가야지.
장난 삼아 회사 때려치고 윤희네 집에서 살림하면서 고시공부라도 할까? 생각한 적도 있었고
휴직중인 동안 한번 보러가긴 해야겠다 하면서도 수업에 알바에 결국 못 갔었는데.
결국은 이렇게 닥치면 일주일만에 비행기표 구해서 델룽 떠날 수가 있다.

결혼식 전 놀토는 단 한 번. 그게 하필 현충일 연휴라 좌석은 대부분 만석.
그래서 금욜 수업을 하나 째고 금토일월화수를 다녀오기로 했다.
윤희는 바쁜 직업 중에서도 끔찍한 것 중 하나인 투자 애널리스트라,
매일같이 새벽 출근에 새벽 퇴근인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출근한 동안 집에서 알바하고 운동하고 주변 산책이나 하고,
주말만이라도 함께 식사하며 같이 시간을 보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가는 거다.

내 인생에서 딱 6년을 제외하고 함께해온 친구가 결혼을 한다는데,
하룻밤 정도 오붓하게 이야기 나누지 않고 어찌 떠나보낼 수 있겠나.

결코 새 여권을 꼼지락거리며 도장 찍고 싶어 안달내다가 "앗싸!" 소리 지르고 냉큼 표 산 거 아니라규!!!

관광을 할 것도 아니고(3년 전 가족여행으로 다녀왔으나 대체 어딜 갔었는지 기억조차 안 남)
윤희네 집에서 잘 거고 해서 표를 끊고 나자 아무것도 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전날 생각해보니 일단 표를 프린트는 해야겠고 환전이란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고(;;)
가방도 싸긴 해야할 테고 걔네 집 위치가 어딘지 정도는 알아야 하고
회사에 있는 애랑 연락하려면 로밍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럴 때 3G가 아쉽긴 하다;)
혼자 노는 거야 능숙하지만 뭔가 하려니 죽어 있던 모디아도 살려내야겠고
사진도 심심하니 파류양한테 액션샘플러도 빌려보고 필름도 마련하고
친구들한테 필요한 거 있냐고 물어봐서 면세점 주문도 해놓고
멍 때리고 있다가 하루 반나절 만에 모든 거 다 처리하려다가 바빠서 체 하는 줄 알았...

그렇게 3시 반까지 짐을 싸다가 5시 반에 일어나서 공항행 =)
다녀오겠습니다, 싱가폴에.



**
사실 팔아버리려던 모디아에 새로 백업전지까지 갈아끼워줬는데.
비행기 안에서 일기를 쓰고 도착해보니 CF카드 리더기가 없...
그래서 위의 내용을 전부 다시 타이핑 하고 있는 바보같은 나 - _ -
싱가폴 현지에서 매일매일 여행기를 올리겠다는 포부는 물거품이 되어버렸습니다.
일단 3일째인 오늘 1일째라도... =ㅅ=;

by kisa | 2009/06/04 01:37 | I remember | 트랙백 | 덧글(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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