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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언제고 다시 반복되는 다짐


오쿠다 히데오 지음, 임희선 옮김 / 북스토리


성큼성큼 복도를 걸었다. 아아, 말해버렸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가슴속이 시원하고 후련했다. 바람이 불어서 두터운 구름이 흩어져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금 이 순간, 자기의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깨달았다.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것보다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바닥이 마르고 압박에 조여왔던 나는 입술을 깨물고 손대기 싫었던 황금열쇠 카드를 뒤집고 말았다. 그것도 내 속을 갉아먹을 걸 알고 그랬는데. 결과는 예상 이상으로 처참했다.
정말이지, 나답지 않은 일은 하는 게 아니야.
나다운 일, 혹은 내가 괜찮다고 하는 일, 그 기준은 뭘까? 나란 인간이 벌써 일관된 기준과 철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건 단지 내 안에 어슴프레한 형태로 자리잡고 있을 뿐이다. 솜으로 만든 하얗고 보들보들한 그물망과 같다. 거기를 무사통과하기만 하면 된다. 어떤 때는 촘촘하고 단단한 낚시줄과 같고, 어떤 때는 안개처럼 흐리멍텅하다. 상황에 따라 변하지만, 속이거나 속지는 않는다. 그 그물망이 어떤 식으로 왔다갔다 변하든 간에, '마음에 걸리거나 혹은 걸리지 않거나" 한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겪어보지 않은 좋은지 나쁜지 모르겠는 애매모호한 상황보다는 겪어본 적이 있는 살짝 나쁜 상황이 마음의 평화에 좋다고 최근 떠올렸었다. 여전히 수긍하면서도, 약간은 새롭고 변화무쌍한 구도의 현상황을 즐기고 있기도 하다. 그러면서 반복해서 되뇌인다. 결국은 자기 성격대로 사는 거야. 안 하던 짓, 이라기보다는 평소의 마음에 걸리는 짓은 하지 말고, 지금의 내 마음에 솔직한 일이라면 하면 되는 거야. 그런 마음으로 살고 있다.

날씨가 좋다. 하늘이 예쁘다. 구름이, 햇살이, 겹겹이 다른 색깔을 보이는 초록 잎사귀들이 아름답다. 뒤늦게 동네에 아지트를 만들었다. 살살 걸어 <달콤한 목요일>에 자리를 잡아 알바를 하고, 책을 읽는다. 간간히 도착하는 문자와, 마주하는 사람들에 웃는다. 예전보다 나쁜 일을 잊는 속도가 빨라졌다. 가족과 많은 이야기를 한다. 술 한 잔에 기분을 푼다. 반성을 하고 경각심을 일깨우면서도, 얼른 털고 일어선다. 아직 그렇게 주저앉을 때는 아니다. 기실, 언제고 주저앉을 필요는 없다.

<GIRL>과 같은 소설에서 30을 넘긴 여성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웃고 찡그리고, '이건 일본 소설이니까 나이에 한 살을 더해도 괜찮아!'하면서 더 위안을 얻고. 언제나 늦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결정되지 않은 미래에 대해 움츠러들 필요가 없다고 토닥인다.

by kisa | 2009/09/09 17:37 | I am | 트랙백 | 덧글(4)

[도서] 악인 :: 악인은 누구인가를 묻는 당신은 누구인가

악인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오랫동안 책장에 꽂아두었던 책을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사실 소설이란 것도 다분히 시대를 타는 물건이라 '새로움'과 '충격' 같은 건 같은 시퀀스에 서지 않으면 잘 알아채지 못한다. 고전이란 그런 것을 초월한 가치를 지닌 작품을 지칭하지만 어디까지나 탄생한 시대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악인>은 독특한 서사랄지 그런 거에 대해 딱히 감동 받은 부분은 없었고, 일본국제교류기금에서 번역가상을 수여할 만큼 뛰어난 문장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갔다.

하지만 한 가지.

"그는 악인이었던 거죠? 그런 거죠?"

이 대사의 의미를, 뒤늦게 알겠다.
상대가 과연 진짜로 나쁜 사람이었는지를 확인하려는 의도 뒤에 숨겨진,
자기가 피해자로 서고 싶은 마음.

여인은 스스로가 피해자라고 떠들다가 상대를 진짜 악인으로 만들어버린다.
상대는 주변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가 악인이 된다.

피해자는 마음이 편하다. 누군가를, 상황을 비난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결과를 불러일으킨 것에 대한 책임을 느끼지도 않고 반성을 하지도 않는다.
모든 것을 거대한 악으로 몰아간다.
나쁜 날씨를 탓하고, PMS를 탓하고, 교통혼잡을 탓하고, 나쁜 타이밍을 탓하고.
사소한 문제에서건, 거대한 문제에서건,
겸허한 마음과 자기 반성이란 것은 현대인에게, 우리들에게 아득한 사상이 되어버렸다.

by kisa | 2009/05/27 00:10 | I like | 트랙백 | 덧글(0)

[도서] 낭만과 모험의 고고학 여행

낭만과 모험의 고고학 여행
스티븐 버트먼 지음, 김석희 옮김 / 루비박스

한동안 렛츠리뷰에 안 들어가다 간만에 눈에 띈 게 이 책이었다. 5년 전, 동유럽과 지중해로 떠났을 때 각국에 흩어져 있던 유물들. 특히 터키 서해안과 그리스에 걸친 많은 유적들에 대해, 나름 공부도 살짝 하고 떠나긴 했었지만 그래도 뭔가 "이렇게 큰 걸 만들다니 대단해!"라는 것만으로 감동의 요소가 채워지진 않더라. 아르테미스 신전이란 것도, "어째서 불가사의지?" 싶고.
그래서 여행을 앞두고 마야 아스텍 잉카 문명 등에 대해 좀 알고 싶었다. 아스텍의 역사는 알바 때문에 징하게 봐서 테토치티틀란과 케아스뭐시기코틀 뭐 이런 이름들로 대강의 흐름은 알겠지만 그래도 머릿속에 콕콕 박히진 않은 느낌. 전문 서적을 들이팔 용기는 없고, 문외한에게 상냥한 책이면 좋겠는데. http://valley.egloos.com/review/item.php?id=10308&opt=html 요길 보니 딱 맞는 거라. 다루고 있는 소재도 다 관심이 가고. 게다가 표지의 사진이, 왠지 터키에서 내가 걸었던 그 오래된 도시 같아서 더욱 마음이 끌렸다.

책은 가볍다. 종이질은 안 좋다. 글씨 크기는 그냥 저냥. 앞에 사진 화보가 여러 장이 되는데, 중간에는 챕터 시작 외에는 그림이 없다.
뭐 좋다. 난 쓸데없이 무겁고 번쩍거리는 종이는 싫으니까. 근데 사진은 좀 많이 아쉽다.
여러 가지 소재를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건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를 따라 순장이 되었던 어떤 궁녀의 시점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늦어서 몸치장을 하다 말고 달려나와 아직도 한 손에 리본을 감아 쥐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고대의 어떤 장면을 포착해서 그걸 현재의 발견물과 연관지어 설명하기도 하고, 평범하게 발굴의 역사를 늘어놓기도 한다. 비의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낭떠러지 아래의 호수로 던져졌던 사람, 유물들이 발굴되는 과정, 그리고 그 옛날, 50달러 75달러(물론 가치가 달랐겠지만)에 유적을 통째로 사서 발굴했던 고고학자들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정말 맛배기라는 것이다. 조금 더 차근차근, 흐름 속에서 사건을 짚어주거나, 배경과 발굴의 의의를 이야기해주면 좋겠는데. 아주 단편적으로, TV에서 가끔 나오는 5분짜리 영상처럼, 잠깐 흥미만 동하게 하고는 끝나는 느낌이 있다. 처음에 서문은 문장을 너무 기교가 심하게 써놔서 도통 읽을 수가 없이 복잡하기에 의욕을 꺾더니만, 뒷부분은 맥이 풀린다. 가끔씩 출토물과 유적의 생김새를 반 페이지에 걸쳐서 나열하고 있으면 졸린다. 그림 한 장을 넣어주면 좋았을걸. 번역자의 약력이 너무나 대단하기에 기대를 많이 했는데, 원문을 잘 옮겼을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다지 감흥은 없었다. (오타도 몇 개 발견하구!)

그래도 소개글에서 강조한 부분은 다 맞는 말이었고, 그래서 기대 이하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단지 그 이상을 조금 원했는데 보답을 못 받은 것뿐이지. 이런 식으로 어떤 분야에 대해 개론보다 훨씬 소프트하게 일반인에게 다가갈 수 있는 책들은 더 꾸준히 나와주었으면 한다. (괜히 유명한 학자들이 쓰는 건 어려워서 읽을 수가 없다고! 손바닥만한 크기의 책들이라도. 역시 무언가를 잘 알고 전문가인 것과, 그 내용을 잘 전달하는 것에는 큰 갭이 존재한다.) 고고학에 흥미가 동하시는 분께는 추천. 일반적으로 책을 많이 읽으시는 분이라면 한 번쯤. 그러나 이 책 한 권으로 모든 신비가 풀릴 거라는 기대를 안고 펼치시는 건 말리겠다. 그야말로 Doorways through time, 대문을 빼꼼 열고 들어가는 것에 불과하니까.
렛츠리뷰

by kisa | 2008/10/25 00:00 | I like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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