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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가슴 두근거리게 즐거웠던 저녁

일주일 정도, 무기력증에 시달렸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아니, 무기력한 것 자체는 곧잘 있는 것이겠지만, 그걸 하나의 증세로 파악하고 '난 지금 무기력하니까 안 되겠어'라고 판단하고 그 흐름에 맡겨 행동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을까. 굳이 뭔가를 하려 애쓰지 않았고, 만날까 했던 약속들도 취소시켰다. 도중에는 한 주일 내내 혼자 계실 어머니를 위해 양수리에 내려가버렸다.
시간표가 목금토로 바뀐 이래, 한 주가 흘러갈수록 불안감에 휩싸인다. 날씨도 꿀꿀하겠다, 정말 가기 싫은 발걸음을 억지로 옮겨 학교에 갔다오고 난 금요일 밤 11시 30분, 잠자리에 들기가 두려웠다. 내일 아침도 일찍 일어나 학교에 가야해, 게다가 끝나자마자 크로키, 끝나자마자 정모. 토요일 수업은 격주이던 것이 3주 연속으로 잡힌 것이었고, 크로키는 이번 달 모델이 중년의 아저씨인 것에 완전히 좌절해버린 상태였고(한 팔을 허공으로 뻗은 포즈를 좋아하신다), 정모는 내가 주최한 것이었다. 안 그래도 무기력하고 온몸이 쑤시는 데다가 수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내일의 스케쥴을 생각하니 더 골치가 아파왔다. 학교를 늦게 갈까?  크로키를 빠져버려? 고민하는 사이에 잠은 더 달아난다. 겨우 알람 시간을 결정해 셋팅하고 누워서도 짜증이 남아 편하게 자지 못했다. 결국, 아침에 알람 소리에 깼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가 컨디션과 이성과의 격투를 벌인 후, 결과적으로는 무기력의 압승으로 학교 수업도 크로키도 둘 다 째고 말았다. (참고로 지금까지 학교 수업을 한 시간이라도 빠진 것은 1학기 여행 일정 때문에 딱 한 수업뿐이다)

정모는, 내가 여행 전부터 다니던 네이뇬 카페, 남미사랑의 것이었다. 여행 시작 전부터 내내 도움을 받고(개인적 욕심으로 정팅을 주선하고 첫 정모도 주선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주인장의 민박집에 묵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감사와 애정의 마음이 가득한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는 정보만 얻고는 여행 끝나면 사라져버리는 게 내심 안타까웠다. 그래서, 여행을 이미 다녀온 사람도 계속 활동하고 정겨운 분위기가 유지되는 그런 카페로 일궈나갔으면 하고 나름 노력해오고 있던 것이다. (현대의 직딩으로서 취미가 맞는 이성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온라인 카페뿐이라는 부추김에 따라 한두 개 찝적거려보고도 얼마 지나지 않아 지쳐 떨어져나가던 나로서는, 상당히 돌아올 것 없는 일에 힘을 쏟은 이례적이고 그만큼 순수한 시도였다고 말할 수 있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수희를 만나 날짜만 박았건만, 촉박한 일정에 비해 대응이 좀 느렸다. 그래서 결국엔 답답한 사람이 나선다고, 토요일 저녁에 그나마 한가할 만한 동네로 장소를 정했다. 평소라면 전혀 다닐 일 없는, 오로지 등교길에 환승하던 동네에서 늘 간판만 보던 가게들을 직접 들어가 자리를 확인하고 예약할 수 있는지 문의해두었다.
나는 카페에만 글을 올리고, 수희가 자기가 가진 연락처를 동원해 메일을 돌렸다. 그중 마당발인 또 한 분 귀돌님이 연락을 돌리시고. 그래서 카페에 정보를 구하러 오는 예비여행자, 이미 다녀온 남미사랑 투숙객, 그리고 수희나 귀돌님이 중남미 전역에서 조우했던 여행자들까지 다채롭게 모여들게 된 것이었다.

난 정말이지, 아무도 안 오면 수희랑 둘이 시원한 밤에 생맥에 치킨을 즐기려고 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의 초기 번개라는 게, 정말 인원이 분위기가 어떻게 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게 아닌가? 근데 비까지 주룩주룩 내린 주말인데도 불구하고 예상 외로 가볍게 모여든 사람들 덕에, '이거 제대로 준비하길 다행이다'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되다니.

모임은 너무나 즐거웠다. 1차로 커피숍에서 만나 일단 한 바퀴 자기소개를 한다. 이름과 여행지만으로 충분하다. 주로 예비 여행자들의 질문에 경험담을 늘어놓고, 루트를 수정해주고 여행지를 추천해주고. 2차의 치킨집은 비좁았지만 그래서 왁자지껄 더 좋았다. 마치 동창회 같은 느낌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주인장님이 전화도 주셨다!)
정보만을 위해 모였던 처음 번개와는 다르게, 다녀온 사람들도 편히 나와서 얘기 나누자고 제안한 건 바로 내가 여행에서 돌아와 얼마 안 되어 열렸던 지난 번 번개 때의 일이었다. 그 때 번개를 주최하시고 1달의 짧은 여행(여기서는 1달이 너무나 짧은 축에 속하는 것이다!)을 마치고 돌아오신 분, 그리고 '30 되기 전에는 갈 거예요'라며 지난 번엔 차를 마시러, 이번엔 치킨을 먹으러 나왔다는 분도 오셔서 재회가 반가웠다. 베테랑 여행자로 남미사랑에서만 세 번을 몇 달씩 지냈다는 형님들, 세계일주 티켓을 끊었으면서 콜롬비아에서만 10개월을 지내다가 귀국하는 데 15일간 7번 비행기를 탔다는 청년, 양복 차림으로 너무나 조용히 있어서 여행 언제 가냐고 말을 걸었더니 사실은 7년 전에 다녀왔고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나왔다고 솔직하게 고백한 여행사 직원, 7박8일의 럭셔리 여행을 즐기셨던 고3 아들을 둔 의사선생님, 아르헨티나 사는 친구를 보러 언젠가는 갈 거라는 디자이너 언니...  그 중 여행 가느라 회사 때려쳤다가 지금 취직 못한 사람이 여럿 ㅋㅋㅋ
20명 남짓한 사람들 중에 실제로 여행중 만났던 사람은 수희뿐이지만, 같은 장소를 이야기하면 반갑고, 다른 장소를 이야기하면 두근거린다. 스쳐지나갔던 사람들을 추억한다. 고생담도 이제는 더 재미난 얘깃거리일 뿐이다. 내가 나가본 바 있는 몇 안 되는 모임들의 무언의 탐색전과 딱딱함이 전혀 없다. 여행자인 우리들은 모두 같은 입장이고, 같은 것을 마음 속으로부터 그리워한다. 

뒤늦게 도착한 것은 "남미의 남매'라고 불리는, 나랑 같이 남미에 들어가는 비행기를 탔던 큰누나, 선영이었다. 막 반가워하는 내게 대뜸 궁상에 대해 묻는 게 아닌가? 음? 알고 봤더니, 나는 그들에게는 별 얘기를 안 했음에도 불구하고, 몇 번씩 계속 여행길에 조우하던 사이에 궁상의 인간성을 꿰뚫어보고는 여행 내내 심심찮게 우리 이야기를 했다는 게 아닌가 ㅋㅋㅋ 내가 정말 불쌍하다, 나라면 혼자 다녀도 될 텐데, 궁상 정말 웃긴다, 하면서 내가 없던 사이 궁상과 얘기를 나눠보고는 사태의 심각함을 느끼고는 일부러 일정이 겹치지 않도록 루트를 바꿔버렸다는 얘기까지;; oTL
사실 남미사랑에서는 그의 존재가 드러나 있기 때문에 나름 사생활을 배려해 동행에 대한 언급은 피했었고, 심지어는 이글루스에서는 남미사랑이라는 검색어로 누가 들어와보지 않도록 이름도 공개하지 않았었는데 ㅎㅎ 그녀가 나의 고충을 알아주고 있었다는 사실에 너무 반가워서 '실은...' '게다가...' 하면서 이야기(=뒷담화)는 계속되었고, 같이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이 완전 공감하고 '나쁜 남자한테 이용 당하셨군요' '역시 동행은 중요해' '근데 다음 여행은 언제 가세요? 제가 따라 갈래요' 운운 웃어주는 통에 완전 열기를 더해갔다 ㅋㅋㅋ 그 와중에 한 연하의 청년이 "우리 만난 적 없나요?"에서 시작해서 "페루에는 언제 계셨어요?" "1월 말에는 어디에 계셨는데요?" 하며 거듭 확인하다 "걘 너무 어려서, 전 누나 취향이거든요"라는 건 중간 수위일 정도로 들이대고 ㅎㅎ 

그 좁은 치킨집에서 자리가 돌고 돌아 가장 구석에 박히게 되자, 간만의 음주(맥주 600cc?)로 취기도 올랐겠다, 바람도 안 통하고 궁상 욕에 흥분했겠다 목소리는 가고 열도 오르고 머리가 살짝 아파왔다. 열심히 목을 주무르다가 순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피곤해서 눈은 풀렸지만, 그야말로 화색이 돈, 웃는 얼굴. 익숙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만큼 신나는 모임을 가져본 게 대체 얼마만인가.
무언가를 바꿔보자 하고, 모임을 준비하고, 사람들이 많이 오고, 좋아하는 것에 대해 막힘 없이 이야기하고, 떠들썩한 웃음이 오가고, 좋은 사람들을 알게 되고, 다양한 인생을 배우고, 내가 좋아하는 점을 인정 받고,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믿어의심치 않고.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말하고 싶은 것을 골라내지 않아도 되고,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억지로 꺼내 놓지 않아도 되는 그런 자유롭고 플러스만으로 가득한 분위기가 얼마만이었는지.

돌아가는 버스 안, 연이어 오는 문자에 답하고 다음을 기약했다. 집에 도착해서 바로 사진, 그리고 준비해서 돌렸던 롤링페이퍼까지 찍어 올려 후기를 쓰고, 연락처도 주소록에 업데이트 시키기까지. 자리에 누웠을 때는 여전히 열에 들뜨고 머리가 죄어 왔지만, 가슴만은 기분 좋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보다 좋은 일이 앞으로 또 생길 거라는 기대감을 완전히 제외하고서라도, 오늘 이 5시간의 만남이 너무나 즐거운 일이었다. 이래서 저래서라는 이유를 대지 않고도 그냥 그 시간이 좋았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 24시간 전과 똑같이 잠은 찾아오지 않았지만 마음은 전혀 조급하지 않았다. 앞으로 24시간 정도는, 아무런 이유 없이 헤죽거릴 수 있을 것 같아.

by kisa | 2009/05/18 03:12 | I am | 트랙백 | 덧글(4)

[물빛사막으로] 008 Post No Bills

by kisa | 2009/04/10 23:16 | I remember | 트랙백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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