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6.08
간밤은 여름날 병폐 중의 하나인 '좀이 쑤셔 잠들지 못하는 밤'. 윤희의 쌔근거리는 숨소리를 확인하고 침대에서 나와 소파로 향했다. 내가 좋아하는 네모난, 그리고 딱딱한 소파였지만 아침에 일어났을 땐 상당히 개운했다. "아침부터 시끄러운 소리에 깨긴 싫잖아"라며 윤희가 맞춰둔 알람에서 은은한 클래식이 흘러나왔다. "사과 깎을까?" 윤희가 출근 준비를 하는 동안 전날 사둔 빨간 사과 하나 노란 사과 하나를 반씩 깎는다. "자기야 돈 많이 벌어와~" 인사를 하고 보낸 다음 커텐을 활짝 열고, 청소기로 바닥에 굴러다니는 여자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치우고, 어제 추천받은 샹송 컴필레이션 CD를 틀어둔 채 알바를 조금. 금세 점심시간이다. 집 지키기 놀이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12시에 맞춰 사무실 앞에서 기다리려던 계획은 물거품으로, 흑흑.

오늘도 윤희와 올루(Olu)와 함께 예전부터 들어왔던 일식 정식집으로. 내가 늦는 바람에 1일 25세트 한정인 오늘의 점심메뉴는 다 팔려버렸지만, 그 대신 시킨 돈까스 정식도 고기에 기름이 잔뜩 낀 주제에 너무 부드럽고 육즙도 진해서 살짝 감동해버렸다. 하지만, 싱가폴 음식 물가 정말 비싸군요. 소득수준과 품질 차이를 고려해야 하긴 하겠지만, 직장인의 일일 점심값이 기본 1만원에서 2만원? 스타벅스 아이스 라떼 가격을 비교해봐도 1000원은 더 비싸다. 서울에서 합리적인 소비 기준으로 2배, 살짝 질러주는 수준으로 1.5배 물가 정도가 아닌가 싶다. 이 나라의 산업 구조와 현금 흐름의 어떤 모양인지 점점 궁금해지지만, 깊이 고민할 부지런함따위 내게 있을 리가 없지. 이제 점점 어디를 가도 우리나라보다 '물가가 싸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나라가 줄어들고 있다. 서울 안에만 있어도 물가는 점점 오르기만 하는데. 언제나 오르지 않는 건 내 월급뿐이지, 반절 재택 알바 인생 ㅠㅠ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헤쳐나와 큰길에 다다르자 Beach Road와 Ophir Road가 만나는 지점이다. 나무! 저기 Nicoll Highway로 넘어가는 오르막에 나무 터널이 있다. 이쪽 가로수는 숫제 나무들이 등고선을 이루고 있질 않은가. 제자리에 서서 한 바퀴를 빙 돌면 정말이지 각양각색의 고층 빌딩이 둘러싸고 있다. 직육면체는 거의 없고 뭔가 깎고 비틀고 파서 외부에는 아름다운 실루엣을, 내부에는 창의적인 공간을 만들어낸다. 정말 부러워!
그중에서 한 빌딩이 아까부터 눈에 들어왔는데, 처음에는 여의도에서 봤을 법한 그냥 좀 화려한 겉치장을 한 건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가까이 갈수록 이거, 뭔가 위용이 남다른데? 게다가 바로 그 앞에 개발이 안 된 땅이 연두빛 잔디밭으로 남아 있어 빌딩의 밑바닥부터 꼭대기까지가 한눈에 들어오니 이거 보통이 아니다. 처음엔 '또 뭔가의 빌딩이겠지, 지도에 이름이 나와 있었으면 궁금하지도 않았을걸?' 싶었던 마음이 모락모락 '저게 대체 뭘까, 통째로 오스트리아 대사관은 아니겠고 호텔이라기엔 간판을 뽐내지 않고 있는데.' 번져나가 결국 그 길다란 잔디밭을 가로질러 걸어가게 되었다.
가까워지면 질수록, 장식이 보통이 아니야! 내부, 뭐 이렇게 토나오게 꽉 차게 화려한 게 다 있누!! 혀를 차며 사진 한 방 찍으려던 순간 경비원에게 제지당했다. 이건 대체 뭐하는 건물인가요? 오피스 빌딩이라우. 그럼 1층은 와인바고, 나머지는 다 사무실? 그렇다우. 우와. 이런 호화로운 사무실이 다 있나. 앞쪽 입구로 나가니 더 하다. 단테, 달리, 뉴튼, 쇼팽 등의 전신 조각상이 서 있질 않나. 한 가운데는 우아한 학이 비상한다! Parkview Square. 건너편에 전용 지하도까지 있어!

왠지 배가 아픈 마음에 학까지 찍어주려고 하는데 디카 전지가 나가버렸다. '체력 하난 질겨.'라며 통뼈 취급하여 밧데리를 챙겨오지 않은 게 실수다. 마침 저녁시간도 다 되었겠다 그냥 MRT를 타고 집으로 집으로. 오늘은 결국 카페 타임을 즐기지 못했네. 먹는 게 최우선인 여행이긴 하지만 굳이 땡기지 않을 때 무리하게 넣을 수는 없지. 다음 끼니를 위해 위를 달래놓자구!
그래서 다음 끼니는 뭐냐 하면 점심 때 작당해두었던 태국 음식점 > _ < 접선 장소인 사무실 앞으로 나가자 완벽한 타이밍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윤희와 올루와 함께 Singapore River를 건넜다. 음? 이 관광코스 한 가운데야? 옹? 저 화려한 건물이라고? 첫날 지나쳤던 Asian Civilisations Museum에 붙어 있는 저 호화로운 음식점이 맛나단 말이지? Indochine의 태국식 그린 커리, 그리고 캄보디아식 해산물 커리, 이제껏 먹어본 중 최고 ㅜ_ㅜb 역시 해산물 하나하나가 싱싱하고 맛나긴 하다, 이 나라는. 내가 지난 대화 중 어이 상실에 의해 기억 속에서 자체 소거한 내용이 있다는 걸 알고 벙찌는 체험을 하며, "새로 회사에 입사하는 사람이 여자친구가 있는 채 와선 안 되지!"라는 올루의 발언에 같이 고개를 끄덕거려주며(그날 점심 때 언급했던 대망의 190cm의 독일남자가 싱가폴 여자친구가 있었다고 한다) 소소한 수다에 아름다운 연주를 감상하고.
둘을 9시반이라는 시간에 사무실로 돌려보내고 나는 불빛이 반짝이는 강변을 좀 더 산책하기로 했다. 이대로 들어가긴 아쉬운 기분. 기껏해야 거기서 거기인 동네를 정처없이 걷다가 낮에 가로질렀던 카페 앞까지 이르렀다. 맨 첫 날 혼자 빌딩 2층에서 발견했던 tcc라는 커피샵은 알고보니 싱가폴 전역에 퍼져 있는 체인점이었는데, 체인 하나하나가 각기 다른 인테리어 컨셉을 갖고 테이블도 소파도 전혀 달라 각 지점을 눈여겨보는 것도 즐거움 중 하나였다.

여기서도 오렌지향 Choco Tango 위에 얹는 건 "생크림으로 드릴까요, 아이스크림으로 드릴까요?"라는 질문에 별 생각 없이 "아이스크림요"라고 대답했다가 영수증에 $1.40(약 1200원) 추가된 거 보고 살짝 거품을 물 뻔했다는. 300원짜리 치즈 한 장 500원짜리 샷 하나도 벌벌 떨며 멤버십 마일리지 차감하지 않으면 안 먹고 마는 우리네 한국인에게 이런 계산 방식은 참으로 옳지 않아! 하고 외쳐본다. 언제쯤 익숙해지려나.
# by | 2009/06/20 00:41 | I remember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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