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가일기] 병가가 끝난 후

두 달의 병가로 마음껏,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기회를 누렸다.
10-11월 내가 집에 있고 침대에 누워 있기도 하고 놀아주기도 하면서 아들의 증상은 많이 좋아졌다.
나도 좋아져서 12월 1일 복귀 할 수 있었다.
복귀 후 우려했던 것처럼 바로 무너지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나의 웃는 얼굴이 좋다며 전염성이 있다고 했다.
자동반사로 얻은 패시브 스킬이 이런 식으로 비추면 좀 씁쓸하긴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지 한다.
연말파티를 팀원에게 맡겨버리고 아예 당일에 참석을 하지 말까 했는데,
다행히 저녁 9시 정도까지는 버틸 수 있었다. 많이 호전되었다는 것이겠지.

다만, 준이는 틱 증상이 전보다 더 심해져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지난 10월에 미리 예약을 했으면 12월에 바로 갈 수 있었을 텐데,,,
이제 와서 예약하려니 다시 두 달을 기다려 2월말이란다.
몇 번씩 다시 전화해서 간신히 1월말로 앞당겨 필요한 검사를 다 받고 의사 선생님과 상담을 했다.
부모가 우울증일 때 자녀가 소아우울증에 걸리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당연한 상황이라고 하신다.
문득 내가 방을 껌껌하게 한 채 이불속에 웅크리고 있을 때 내 방문을 슬쩍 열었다가 조용히 닫고 나가던 준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엄마가 감정을 쏟아주지 못하고, 받아주지 못한 채로 망가져버려 아예 생존을 이유로 노력을 포기했을 때,
그 불똥은 고스란히 아이에게 튀고 있었구나.
불안, 공포, 우울, 충동.
꼭 아이가 학업성취도가 높다고 해서 ADHD가 아닌 건 아니라고 하셨다.
틱은 주변에서 눈치 채고 본인이 인지하기 전까지는 놔두어도 된다고 하셨다. 조절은 할 수 있어도 치료는 불가능하기에.
일단 감정을 이끌어내고 표현하는 훈련을 위해 놀이치료를 하기로 했다.
이번에도 가깝고 꾸준히 갈 수 있는 곳으로.
40분 놀고 10분 상담을 하는데, 아이만큼이나 나에게도 도움이 되는 10분이 되었다.
나의 잘못된 육아방법 중에 가장 놀랐던 것은, 아이의 감정 자체를 통제하려 했다는 점이다.
게임에 졌는데 분해하지 말고 화내지 말고 웃으며 상대방을 축하해주라든가
이건 울 만한 상황이 아니다, 억울해 할 상황이 아니다, 무서워하지 마라 하며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했다.
계속해서 무섭게 큰 소리 내지 말고, 아이를 보듬어 안아주는 연습.

22년 5월.
하루 50만명 확진에 육박했던 오미크론 발 코로나19 상황은 급격히 올라간 만큼이나 급격히 내려와 이제 거리두기도 거의 해제되었다.
복귀 후 일로 인한 불안 증상으로 다시 폭세틴을 30mg으로 올린 뒤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지난 일기의 분류법에 의하면 1번에 가깝다. 매일 항우울제와 수면제를 먹고 있지만, 평소에 내 우울증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지는 않는다.
슬슬 줄여볼까도 했지만 의사선생님은 ‘유지될 때 섣불리 변화를 주지 말자’고 하셔서 동의했다.
10시에 자고 6시에 깨는 패턴이 형성되었다. 아직 아침에 생산적으로 뭘 하지는 못하지만 조급해하지 않는다.
5월 4일, 평일일 줄 알고 준이와 둘이 롯데월드를 갔는데 중고딩 시험 끝 소풍기간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13시간만에 돌아왔고, 준이는 눈 꼭 감고 겨우 탔던 후렌치 레볼루션을 담에 또 타보고 싶다고 했다.
한번도 힘들다고 찡찡대지 않았고, 나도 돌아와서 의외로 피곤하지 않았다.
준이의 생일이자 결혼 10주년인 5월 6일에 우리는 시할아버지 묘 이장을 위해 안동 산골에서 이틀을 보냈다.
초코머핀 세 개를 한 접시에 놓고 촛불을 켜준 것만으로도 준이는 행복해했다. 예쁜 것.

풀린 날씨, 풀린 거리두기, 사무실로 사람들이 복귀하고 우리는 묵은 겨울옷을 안 보이게 치워놓고 봄맞이 청소를 한다.
앞날이 기대되는 즐거운 계획을 세운다. 꿈을 꿔본다.
5월말엔 3년 만의 전직원 행사를 열고
6월엔 MBTI워크샵을 자발적으로 열고,
그에 연동해 부산에 가서 워크샵 겸 팀 단합도 하고.
7월엔, 꿈에 그리던 결혼 10주년 여행을 간다.

2020년 가을,
나는 더 이상 꿈꾸어볼 미래가 상상되지 않아 마음의 병을 앓았다.
2022년 초여름.
드디어 앞날을 그려보고 계획하고 뛰면서 생동감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거기다 싫은 일은 외면하고 뭉개는 스킬도 탑재했다.

기대된다,
내일이.


by kisa | 2022/05/15 15:49 | I am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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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minx at 2022/05/16 02:35
이월되지 않는 작은 성취감들을 느끼고 다독이며 움직여보아요. 가족 모두가 조금씩 나아가는 일상으로의 회복을 응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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