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가일기] 엎친 데 덮쳤거나, 핑계를 얻었거나

*
지난 일기를 쓰고 하룻밤이 지나, 
전치 4주의 무릎내측인대부분파열을 당했다.
_-_
밤중에 일어나 화장실을 가려는데 유난히 깜깜하게 느껴지더니,
문이 아니라 문틀 모서리로 대각선 돌진하여 무릎과 이마를 박은 것이다.
누가 깰까봐 가까스로 비명을 삼켰는데 와우, 다리에 힘을 실을 수 없게 아팠다.
끙끙거리며 간신히 침대에 누워 다시 잠을 청했는데, 다음 날 보니 이마엔 혹이, 무릎엔 멍이.
이게 느무느무 아프고 부은 것도 아니지만 체중 실을 때 아픈 게 불안해서 고민하다 병원에 갔더니
뼈는 괜찮은데 초음파상으로 인대가 부분적으로 찢겨 떨어진 거라...
4주동안 보조기를 밤낮없이 샤워할 때만 제외하고 24시간 차며 무릎을 굽히지 않아야 한단다.

뭐랄까, 너는 이제 한 달 간
더더욱 침대에 더 누워 있어야 하고
더더욱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되며
운동따윈 꿈도 꾸지 말라는....

안 그래도 무기력함과 싸우는 이 상황에서 엎친 데 덮쳤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아주 쓸 만한 핑계를 얻어 더더욱 나태해져도 되거나...?

월수금은 물리치료를 받으러 가고, 화목은 세수도 안 하고 잠옷 바람으로 하루종일 집에서 뒹구는 패턴이 형성되고야 말았다.
그 사이에 나는 사랑의 불시착에 흠뻑 빠져버렸으며,
아들이 보던 wormate 게임에 중독 직전이 되었고,
의욕이 조금씩 샘솟아 옷장정리, 서랍정리, 거실정리를 해치웠으며,
10월 30일에 준이 친구들을 초대하여 할로윈 파티를 거행하였고,
준이의 가을방학 2박3일간 울산 뱀경이네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는 다리가 너무너무 아파서 초음파를 한 번 더 찍었고,
오른쪽 다리 부상으로 왼쪽 다리에 의지하다보니 그쪽 무릎도 아파졌고,
다리를 구부리지 못한 채로 허리를 숙이다 보니 허리 통증도 어마어마했고,
최대한 앉아서 지내다보니 골반과 고관절쪽의 쑤시는 고통에 잠을 못 이루게 되었다.
안 움직이니까 근육 손실로 체중도 빠지고 몸이 불균형해지니,
그야말로 한밤중 가정 내 추돌사고 하나에 신체가 파탄에 빠질 지경이라.
보조기 풀고나면 운동을 안 할래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날은 또 어찌나 추운지.

그래도 오늘은 한 열흘만에 의욕이 돌아와서 일기라도 쓰고 있다.

**
11월 10일자로 폭세틴을 30mg에서 20mg으로 줄였다.
한 달 넘게 경과가 좋아서인데, 이게 그냥 일을 쉬어서인지 호전이 되는 건지.
복귀하면 바로 나빠질지, 견뎌낼지 정확하지 않아서 고민했지만 한 번 시도해보기로 했다.
지난 2주에도 딱 두 번쯤 불안 증세가 나타났는데 둘 다 회사일 때문...
선생님이 어떤 것이 나를 트리거하고, 어떻게 대처하면 좋겠냐고 물어보셔서 대답했다.
벌써 우울증으로 고생한 지 1년을 채웠는데, 그간의 대화를 종합해보면
나는 뭔가를 맡으면 완벽하게 잘 하고 싶어하고, 칭찬받고 인정받고 싶어하고,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물론 지난 주 작업한 연간 인건비 계획과 발표처럼 진짜 잘해서 새 상사에게 대단하다는 칭찬도 받고 그러면
기분이 날아갈 거 같지만, 대부분의 일은 마주할 때부터 이걸 어떡헤 해야되지 싶으니까.
그래서 결론은, 대충대충, 잘하려 너무 애쓰지 말고,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면서 넘겨야 한다는 것인데...
이게 다 성격과 관련된 거라, 쉽게 전환이 될지는.
그러고 보니 사회초년생 또는 중반에, "오늘의 일을 내일로 미루자"라면서 다짐을 곱씹으며 바꾸려 애썼던 기억이 난다.
오늘 모든 걸 해치우고 싶어서 야근하고 미친듯이 집중하다가 다음 날이면 신기하게 한가해서 허망하기도 했던 시절.
이거는 정말 코로나로 재택근무 하면서 하드캐리로 정착된 거 같고 ㅎㅎㅎ 
(뭔가 해야 할 일을 남겨놔야 '요새 일 있냐'고 할 때 답하면서 다른 일을 막을 수 있음 ㅋㅋㅋ)
마감과 완수가 아닌 퀄리티와 의욕과다, 부담의 문제는 2차전인 것 같다.
(아 물론 너무 열심히 하지 말라는 얘기는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회사에서 지속적으로 들었던 말이다 ㅋㅋㅋㅋㅋㅋ)

***
장난감을 잔뜩 정리하고 당근도 많이 하고 집이 깔끔해지니 너무 좋다.
보통은 작심삼일처럼 돌아가기도 하는데, 이번에는 치운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제법 애쓰는 편이다.
그것도 다 지금 내가 여유가 있어서겠지만...
생각했었던 남미여행기라든가 뭐 배우기 운동 이런 건 성취를 못했지만
병가 기간동안 뭐라도 하고 남은 게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 그래서 내가 늘 1년, 학기, 분기 단위로 뭐라도 해내려고 열심히 살았던 흔적이지 ㅠㅠ
성격에 끌려다니지 말고, 성격을 이용해가며 융통성 있게 살기.

by kisa | 2021/11/11 10:53 | I am | 트랙백 | 덧글(0)

트랙백 주소 : http://kisa.egloos.com/tb/6860187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