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가일기] 조금은 나아진 상태

*
10시에 전화 상담을 가벼운 마음으로 마치고,
4신가 병원 진료를 앞두고 2시에 준이 담임쌤과의 정기상담이 있었는데,
와르르.
말이 비수가 되어 꽂힌다는 게 이런 것일까.
퉁퉁 부어 주체하지 못하게 눈물 흘리는 얼굴을 본 의사쌤이 기겁하시고.
이때가 병가를 결심했던 때였다.
500문항이 넘는 질문지를 작성해갔더니 최소 2개월이라시던 선생님이 3개월을 부르셨다.
급여도 해야 하고 어쿠루얼도 해야 하고… 10월 연휴 후 복귀를 생각하고 3주만 일단 쉬기로 했는데.

3주로 기약한 병가 기간동안 나는 쫓기는 느낌을 받았다.
빨리 나아야지, 부담 갖지 말아야지, 편안히만 있어야지, 괜찮아져야만 하는데…
감정적으로 다운되고 우울해지는 시간은 참 많이 줄어들었지만
압력 하에서 심장이 벌렁거리고 목구멍이 죄어 오는 순간이 잦았고, 패턴도 없어 회피하기가 어려웠다.
지금이야 압박을 통제한 채로 지내고 있지만 만일 복귀했을 때
축적했던 에너지가 서서히 고갈되어 다시 번아웃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복귀하는 그 순간 와장창 무너져내릴 것인가 걱정이 됐다.

한 일주일을 어째야 하나 고민하다가 큰 맘을 먹었다.
연장할 수 있을까.
복귀하지 않으면 밀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테지만,
지금 이 순간은 회사 걱정을 할 때가 아니라 나를 최우선으로 둬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두근거리고 두려워했던 것에 비해서, 상사와 대표는 흔쾌히 받아들여줬다.
마지막 오지랖에 가까운 양심을 발휘해서 3개월 풀이 아니라 11월말까지로 타결되었을 때,
너무나 홀가분하고 “날 듯한” 감정을 느꼈다.
훨씬 여유가 생기고, 부담감이 줄고.
원래 복귀 예정이었던 한 주는 여러 일을 처리하느라 근무를 제법 했지만 견뎌낼 수 있었다.
진짜 맥을 탁 놓고, 쉬어도 된다는 기분.

개천절 연휴에 제주도에 갔는데,
3일째 되는 날 문득 깨달았다. 사흘간 한번도 심장 죄임을 느끼지 않았다는 걸.
우와. 진짜 쉬니까 나아지는구나…
서울에 돌아와서 아예 없어지진 않았지만 한 달 전에 비해 확실히 호전됨.

**
남편이 노력을 많이 해주었다.
전화도 자주 하고, 집에서도 더 많이 움직이고 챙기고, 무엇보다 준이 앞에서 큰소리를 치는 일이 줄었다.
다정함이 느껴지면 나 또한 누워있기만 하는 게 아니라 말로라도 고마움과 다정함을 표현하려 하고 사소한 일도 웃음으로 연결하려 했다.
서로 원하는 걸 밀어붙이지 않고 상냥하게 제안하고 조율하여 결정한다.
참, 요즘 우리 가족이 빠진 숨겨진 유산 숨은 그림 찾기 게임도 자꾸 붙어있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ㅎㅎ
선순환으로 준이도 틱 증상이 사라졌고 훨씬 안정되는 모습을 보여서 내 걱정도 줄었다.
풀배터리 검사든 오은영이든 일단 11월까진 잊어버리련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일은 거의 환자처럼 지낸다.
늦게 일어나고, 밥을 안 먹고, 또 낮잠을 자고…
운동은커녕 억지로 억지로 일어나 커피를 동력 삼아 하루 한 번 정도 바깥 바람을 쐰다.
준이는 거의 이모님께 맡겨둔 채. 멍하니 잠에 취하거나 영상에 빠져들어 사고를 막는다.
잠이 너무 오고 하품이 쩍쩍 나와서 수면제 양을 줄이면 어떨까 선생님께 상담드리고 싶지만,
그렇다고 잠의 질이 나아지지도 않았고, 또 잠이 쏟아질 때면
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몸을 맡기면 잠시는 고민이나 걱정을 내려놓아도 되는구나 하는 안도감에 빠져들어 기꺼이 웅크린다.
저녁이 되면 아 빨리 밤이 와서 불을 꺼버리고 싶다… 하며 전전긍긍 안절부절 못하는 느낌도 들고.

주말이면 확실한 일정을 세워 놀러가거나, 아예 나태하게 늘어져 있거나.
이모님이 가시고 늦잠을 자고 아침식사를 아노플라에서 베이글 배달시켜 먹고, 11시까지 그냥 소파에 늘어져 있으면
그렇게 행복하고 ‘쉬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그런데 평일에 나태하게 있으면 쉬고 있는 느낌이 아니라 ‘이래도 되나’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 ‘까먹은 볼일을 처리해야 하나’ 전전긍긍.
간신히, 간신히 힘을 내어 마음을 다잡고 연락 한 번. 결제 한 가지. 메일 한 개.

****
이전에 회사 사람 푸념을 들어주다가 완전 다크 사이드에 빠졌다고 그랬더니
선생님이 너는 지금 절대 다른 사람 고민 들어줄 상태가 아니다 무조건 끊어라 그러셨다.
어떻게 잘 대화를 중단시키나요 했더니 그런 방법은 없다고, 거짓말이란 게 뻔해도 피하라고.
그래도 나를 지탱해주시는 우리 엄마의 힘듦은 내가 듣는 것만으로도 나눠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회사에서 온갖 스트레스를 유발할 사건도, 나 말고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거 같다고 했더니
상사는 이 사건에서 가장 멀어져야 할 사람이 있다면 너라며 맡지 말라고, 대표한테 부탁하겠다고 하더라.
참으로 감사하더라.
그런데 다음 날 대표가 전화해서 “이걸 어떡하지? 누가 맡지?” 하길래 “넵 대표님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한 나.
우리 대표님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데 이렇게 시간 끌고 신경 쓰이는 일 하나 정도는 해야지…
쉬게 해주시는 게 어딘데…
깔끔하게 회신해서 끝나는 일이라면 업무가 좀 있는 것이 오히려 내게 활력을 주는데.
그런 몇 개의 일들을 둘러싸고 쓰잘데기 없고 복잡하고 화나고 질질 끌고 마무리가 안 되고 혼란의 도가니에 빠지는 일이 너무 많으니까
내가 섣불리 메일함을 못 열게 되는 것이다… 전화도 가려 받고…

*****
지난 번 일기에서 상처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확실히 한 달 전에 비해서는 호전이 된 거 같다고 했다.
어디까지 호전될 것인가. 어디가 내 정상으로 돌아오는 시점일까.
낫고 있다는 감사함이 있지만서도, 아직 병가가 한 달 넘게 남았다는 안도감이 있으면서도,
앞으로 이렇게 호전을 실감할 단계가 많이많이 남은 것 같다는 무력함이 나를 지배한다.

by kisa | 2021/10/18 12:56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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