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우울에서 회복하는 중

"하우 아 유?"
"아임 파인 땡큐, 앤 유?"

이 대한민국에서 누구나 배우는 평범한 회화 문장이 겉잡을 수 없는 울음을 터뜨리는 주문이 되리라곤 생각해보지 못했다. 거의 매일, TC로 회의를 하기 위해 인사를 나눌 때 받는 질문에서 great, good, fine이라는 단어를 쓰지 못한 지는 꽤나 오래 되어 okay라고만 응수했고, 스산한 바람이 부는 계절이 되자 아예 대답을 회피하게 되었으며, 결국에는 trigger가 되어 울게 만들었다. 

신기한 것은 나와 같은 시기 힘들어했던 나의 상사도 똑같았던 것이다.
내가 참고 참다가 견디지 못하고 도움을 청했을 때 단번에 너무나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주었고, 구체적인 방안을 얘기 나누기 위해 다음 미팅을 잡았는데, 해상도 낮은 카메라 화면 너머로 보이는 얼굴이 너무 안 좋아보였다. "Are you okay?"라고 물었을 때 나의 상사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런 모습은 처음 보았다. 서로가, 무너져내리는 상태 속에서 서로를 걱정했다. 몇 주 완전히 업무에서 단절해서 휴식을 취해야 하지 않겠냐던 제안에 어찌 그럴 수 있겠냐며 해야 할 일은 하겠다고, 다만 평소의 내 모습보다 조금 덜 생산적으로 느리게 일하겠다고 말했는데, 상대방을 걱정할 때는 당장 쉬라고, 회복에 전념하라고 말하는 우리들. 상대방을 걱정하듯이 스스로를 걱정하고 보살피라는 말에, 그러겠노라고 하며 따뜻함을 느끼고, 또한 아이러니를 느꼈다.

번아웃. 
장기적으로 에너지 레벨이 낮아짐에 이어 코로나 상황에서 에너지를 채울 수 있었던 방도들이 극단적으로 차단되었기에 임계점을 돌파해버린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자동차에서 주유등이 깜빡거리기 시작한 후로는, 5천원을 주유하고 1만원을 주유해도 게이지가 올라가지 않듯, 회복이 어렵고 계속 깜빡거리는 상태.
MBTI 공부를 하면서 선호하는 기능과 그렇지 않은 기능을 이해할 때, 그 행동을 할 수 있는 스킬이 있더라도 내 에너지를 얼마나 소비하느냐로 분간한다. 아이랑 부르마블이나 규칙이 있는 게임을 가지고 놀아주는 건 쉽다. 아이에게 동화를 지어내서 들려주거나 인형놀이를 해주는 건 에너지가 빨려나가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람은 내게 편하고 쉬운 기능을 많이 사용하고,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는 상황은 피하려고 애쓴다. 너무 정리된 공간이나 너무 어지러진 공간이 불편한 이유. 
살아가는 동안 모든 상황을 회피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그 사실을 인식한 채로 임하게 되면 정신적인 소모가 살짝 덜한 느낌이 들기에 잘 파악하려고 노력하면서 산다.
그간 내가 만화원고, 책자, 홈페이지 등 "편집"일을 좋아하면서도 그 과정 자체는 여전히 고통스러워 한다는 지점에 아이러니를 느꼈는데, 이번에 확실히 파악하게 되었다. 밤을 새면서 1mm 3 pixel을 맞추는 건 손 아프고 목 아프고 눈 피곤한 일이지만, 완성작을 보면서 뿌듯한 느낌이 그 모든 것을 보상하는 것이다. 
회사일도 마찬가지였다. 그간 인사 일이 내 천성에 맞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그 스킬을 익히는 데 꽤나 오랜 세월이 걸렸다. 처음 만나는 사람 응대하기, 안 친한 사람과 깊은 대화 나누기, 사람을 대하는 법에 대해 코칭하기, 여러 사람 앞에서 발표하고 분위기 띄우고 설득하기 등등. ...이렇게 열거하고 보니 내가 왜 사람 대하는 인사일을 하고 있지 하는 자괴감이 느껴질 정도로; 하지만 남들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여 에너지 효율 등급 낮을 뿐이지 그 스킬을 익히지 못한 건 아니라. 원만하게 잘 해내왔다고 생각한다. 그 주변으로는 현상을 파악하여 원리를 꿰뚫기. 구멍 없는 제도 만들기. 계획한 대로 진행하기. 한번에 파악 가능한 데이터베이스와 매뉴얼과 시스템 설계하기. 만든 제도를 실제화 시켜 적용한 후 진짜 설계한 대로 굴러가는 것을 보고 임상 성공을 축하하기. 힘들였던 프로젝트의 완료를 축하하기. 사람들이 그런 걸 보고 기뻐하고 재미 있어하고 고마워하는 것을 보고 뿌듯해하기. 그런 내 내향적 직관(Ni) 기능을 발휘하고 성취에 행복해하는 과정을 통해 에너지를 축적해 왔는데.
코로나 상황에서 그 모든 것은 희미해지고 무너져 갔다.
지난 날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킬 만큼 심각했던 사건들에서는 오히려 즉각적으로 '대응'하고 '해결'하는 task를 통해 상황을 통제해내어 정신을 수습했는데, 오히려 특정 사건 없이, 에너지의 고갈만으로, 번아웃.

주유등이 깜빡거리는 상황에서, 즐겁고 행복한 일을 더하는 것만으로는 수습이 불가능했다.
에너지를 갉아먹는 모든 것을 차단하는 게 급박했다.
기분 변화와 절망과 울음 이외에 지속적으로 괴로운 증상은 기억력 감퇴와 집중력 저하였기 때문에, 내가 지금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알아도 착수하지 못하고 착수해도 진행하지 못하는 상황이 힘들었다. 그러면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나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판단'이 개입할 필요 없는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업무는 그나마 가능했다. 그리고 지금의 작업이 후일 중요한 영향이 미치는 일들도 내려놓지 못했다. 그 이외는 도저히 쳐다볼 수가 없었다. 

어떻게 증상이 진행되었는가보다, 어떻게 증상이 호전되었는가를 통해 변화를 설명하는 게 확실한 것 같다.
기분 변화와 절망과 울음은 약으로 진정시켰다. 


눈가리개를 씌우듯 불안한 감정으로부터 격리시켜, 나락으로 떨어지는 문을 닫아둘 수 있었다.
일을 해야 하는 아침에 가슴이 벌렁거리는 일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저번에 나를 감정의 회오리에 빠뜨렸던 그 미팅을 무난하게 대답하고 무난하게 지나갈 수 있었다.
미뤄두고 쳐다보지 않았던 업무를 다시 꺼내어 한 발짝 진전시켰다.
자꾸 까먹는 게 괴롭혔던 주간미팅 잡는 일을 결국 다른 이에게 넘기지 않고 지속해나갔다. 대신 더 간소화했다.
답을 하기 힘들었던 단톡방에 시시콜콜한 일을 올렸다.
안 가본 새 카페를 시도하자, 실패해도 괜찮아, 라고 생각했다.

지난 주말에는, “차후를 위해 이걸 해볼까? 오늘부터 해볼까?”라는 생각이 떠올랐다가 깜짝 놀랐다.
그런 생각이 든 게 너무 오랜만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남편이 나를 달래기 위해, 나중에 영국에 놀러갔을 때 구경갈 곳들을 정하자는 의미에서 책을 빌려주기도 하고, 메모장을 만들기도 했는데. 머리로는 그런 일들이 원래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하는 게 좋다고 알면서도, 끄덕이면서도 전혀 책장이 넘어가지가 않았다. 감정적으로 연결이 되지 않았다. 전압이 안 맞는 코드를 끼워, 흐름이 없는 기분. 매일매일 방어하고, 차단하고, 버티는 것에만 집중하다가 진짜 두어 달 만에 툭 튀어나온 것이다. 휴직했을 때 블로그를 활발히 운영하려면 지금부터 쌓아놓는 게 좋지 않을까? 오늘 네이버 들어가서 셋팅하고 간단한 글을 올릴까? 진짜 별 거 아닌 생각이었지만, 너무 오랜만에 든, 미래를 생각하는 기분. 결국 당장 쉬운 걸 택하고 실제 실천에 옮기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정신이 맑아졌던 기분을 잊지 못한다.

그 다음다음 날인가는 출근을 했다가 여러 작업을 하는데. 아 이거 이거까지는 끝내놓고 가야겠다, 좀 늦어도, 라고 생각했다가 또 깜짝. 조금 고되더라도 하던 걸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정리해놓고 가면 상쾌하겠다, 라는 생각을 너무 오랜만에 했더라. 원래 이런 편인데, 남겨놓고 가면 찜찜해하고 다시 착수하려면 더 힘든데. 오랫동안은 뭐든지 안 건드리고, 안 하고, 미루고, 잊어버리고, 생각나도 하기 싫고, 그랬던 거다.

궁금한 게 있으면 바로바로 검색하곤 했는데, 이상하게 내가 먹고 있는 약은 검색하질 못했다.
검색 결과가 너무 심각해도 못 견딜 거 같았고, 너무 가벼워도 못 견딜 거 같았기 때문이다.
한참 좋아진 다음에야 검색해봤더니, 아주 보편적인 항우울제의 하나였다. 특별할 건 없었다.
체중이 3킬로나 줄어서 의사에게 얘기했더니, 원래 그 약물의 부작용이 그렇다고 한다. 입맛이 없어진다고.
“음 입맛이 없고 먹고 싶지 않다기보단... 딱히 당기는 음식이 없고 몇 입 먹으면 금방 배부르고 그러는데요.”
“그게 바로 입맛이 없다는 거예요 -_-”
그래서 힘드냐고, 약을 바꿔야겠냐고 해서, 아니라고 살 빠지면 완전 좋죠 ㅋㅋ 이렇고 말았다.
내 경과에 대해서도 말씀드렸더니 아주 축하할 일이라면서, 원래의 내 모습으로 돌아가는 현상들이 하나하나 차도가 있다는 증거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엑셀 작업을 하면 상쾌해진다거나 일을 끝까지 마무리하고 퇴근하는 게 기분이 좋다거나 하는 게 원래 모습이라는 데서 갸우뚱하심)

그렇게 예전 내 모습을 발견하는 게 반갑고, 점점 극복해나가고 있다는 게 스스로 대견하면서도,
그 동안 내가 이렇게 많은 것들을 잃은 채로 있었구나, 내 자신이 아니었구나, 하는 게 씁쓸한 아이러니.

이제 그만 괜찮겠다, 싶어 스마트폰에서 업무 메일 앱을 첫 화면으로 다시 꺼내왔다.
자꾸 새 메일이 왔는지 빨리 보고 싶고 해결하고 싶어 확인하느라 몇 번씩 눌러 들어가는 게 귀찮음이 위로 올라왔기 때문이다.
그러고 며칠 있다가, 다시 뒤로 옮겼다.
자꾸 확인하면서도 읽고 스트레스 받는 게 내 본래 모습이긴 한데, 돌아왔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그 행동 때문에 번아웃이 일어난 것도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천성이 스트레스를 끌어온다면, 조절하고 변해나갈 필요도 있는 거지.
숫자가 늘어났는데 무시하고 안 보려고 애쓰기보단, 안 보이게 해놓고 신경 끌 땐 끄고, 신경 쓰일 때만 찾아보는 게 낫겠다.

약을 줄일 필요는 없을까요? 여쭸더니 이대로 계속 올라오고 안착할 때까지는 유지해야 한다고 하기에 알겠다고 했다.
초등학생 학부형으로 변신하는 3월 4월의 대박 스트레스 개봉 박두 기간까지는 주의할 필요가 있을 거 같다.
2월 말에 상담 예약을 계획중.

잘해봐야지.

 

by kisa | 2021/02/11 13:44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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