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우울

"한 가지를 꼭 약속해주셔야 해요.
상담 과정동안 절대로
스스로를 해치거나
목숨을 끊으려고 하는 행동을 하지 않겠다.
그렇게 약속해주셔야 상담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을 내 귀로 들어본 건 처음이라, 피식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하면서도 뭔가 묵직하게, 아니 긁히듯이 속을 건드린 느낌이 들었다.

무력감이 적체되던 와중, 계기가 하나 있었다.
한 팀장님과 3시간을 넘게 대화했던 것이다.
회사에 필요한 일이었고, 잘 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내가 가능한 한 돕고 싶었다.
어렵지만 도전해볼 만한 일이었고, 평소 궁금하고 대화하기가 즐거운 면이 있어서 걱정되진 않았고, 저녁 술자리라 무겁지 않았다.
세심하게 초석을 깔고, 시간 장소를 셋팅하고, 텍스트북에 의거한 공부로 준비하여 순조롭게 흘러갔다.
사실 맨 마지막에 말이 좀 많아졌던 것 빼고는 잘 해내서 좀 스스로가 자랑스러워 칭찬하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나는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혔다.
3시간 여 훈계가 아닌 질문을 통해 상대방의 생각을 이끌어가는 코칭을 하는 동안 나는 계속 묻고, 궁금해하고, 들어주었는데.

나에 대해서는 누가 궁금해 할까?

그 생각이 랩에 인쇄하여 들러붙은 것처럼 떠나지를 않았다. 회사와 집을 오가는 쳇바퀴 같은 매일에, 누구나 나한테 와서 자기 얘기를 들어주길 바라고 내가 어떤 행동을 제공하기를 바라는데. 내가 어떤지 대화다운 대화로 물어보고 들어주려 하는 사람은 없다. 지금 당장 필요한 단어들만 오고가는 토막, 토막들. 저녁 식탁에서 매일 아이에게 오늘 유치원이 어땠는지 물어보아도. 내게는 물어주지 않는다. 이따금 대화의 시작으로 질문을 받아도, 내 입은 점점 닫혀간다. How are you? 몇 달 간은 I'm okay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서 상담을 잡았다.
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는 그 많은 말들을 가만히 들어줄 사람은 상담사밖에 없을 것 같았다. 너만 힘드냐? 나도 힘들다. 이렇게 대답하지 않을 사람. 돈을 주고서라도 그런 사람을 사야 살아남을 거 같았다. 본래 블로그에 일기를 쓰며 가슴에 쌓인 것들을 글로 풀어내는 게 내 중요한 도구 중 하나였을 텐데, 그 마저도 가슴이 막혀서 할 수 없은 상황이었다. 마침 전 회사에서 제공했던 프로그램을 현 회사에서도 시작했고, 기대하고 얻을 것을 정확히 알고 그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제일 작은 회의실에 휴지와 물을 들고 들어가 등을 돌리고 앉았는데, 그렇게 울진 않았다. 

뱉어내자마자 바로 후련해진 것 같았다.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명제도 사라지고. 청소를 했다. 몸을 움직이고 자리가 깨끗해지면 개운하다. 연말을 준비하는 것 같다. 판데믹 이후, 기획덕후인 나는 아무것도 계획하지 못하고 살아서 더 힘들었던 것 같았다. 그냥 여행을 못 가고 사람을 못 만나고, 그런 것보다 어떤 '기대'를 갖지 못하는 것 자체가 나를 못 버티게 한 것 같았다.
금요일에는 당장 휴가를 내고 엄마와 시간을 보냈다. 딱히 대단한 얘기하지도 않고 그냥 아울렛을 돌아다니고. 일상의 얘기를 했다.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그 오후에 2차 상담을 했는데, 이미 많이 편해졌다고 얘기했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덮쳐진다. 감정의 소용돌이와 정반대의 느낌, 진공의 상태 같은 것에.
그냥 월요일의 아침이었다. 물론, 주말 내 억지로 웃으려 하고 있단 인식은 있었지만. 
일요일에 싹 비워버린 유통기한 지난 알약들이 한무더기가 눈 앞에 있다. 이것들을 삼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질감을 상상해본다.
짐이 많아 운전을 하고 출근했다. 속도감이 마음에 든다.
사무실에 들어서는데 도무지 표정이 지어지지 않는다. 커피가 입에 쓰고 아무런 충족감을 주지 않는다. 밥을 먹고 싶지가 않다. 배고픈 느낌도, 무슨 느낌도 전달이 되지 않는다.
운전을 해서 퇴근하며 차선을 바꾼다. 속도를 낸다. 멍한 기분이 든다. 달리고 있는데, 멈춰있는 것 같다. 이대로 부딪히면 뭔가 느낌이 생길까? 큰 소리가 날까? 아플까? 내 주변의 시간은 멈출까? 나한테 아무도 무엇도 요구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뭔든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이라. 
감정을 관찰하고 이유를 찾고, 방법을 찾는다.
그래서 걱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말은 듣지 않는 편이 좋을 뻔했다. 
한 번도 돌려본 적 없는 방향에서 소리가 난 것 같아, 신경이 쓰인다.

바쁜 나날은 잡생각을 잊게 한다. 우울했다는 감정마저 잊게 해줄 것이다.
호르몬은 또 달을 채워 지나갈 것이다.
그런데 그 어느 날 아침 일어났을 때의 진공과도 같은 무력감과, 알약의 촉감과, 범퍼가 충돌하는 소리를 상상한 것은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내 힘듦을 흘렸더니, 남편이 숙제를 준다. 나를 기운나게 하는 숙제다. 2년 뒤를 꿈꾸며 여행책을 들여다본다. 그런 마음이 고맙다.
그런데도 바로 어느 순간이라도, 다시 그 우울이 나를 덮칠 것 같다.

우울감이 심하면 정말로 입맛이 없고 체중이 5킬로 이상 빠진다던데.
참고로 나는 맛있고 땡기는 음식이 있건 없건 무럭무럭 살찌는 중이니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by kisa | 2020/11/17 22:23 | I am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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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minx at 2020/11/22 00:57
포스팅을 이제 봤어. 북마크 해두었으나 매일 드나들지 않으니 포스팅 업데이트도 up to date 하지 못하는군. 글을 읽고서야 네 현재 상태를 조금 더 알 수 있었어. 오랜만에 -단 둘이는 거의 십 년(!) 만에- 대화했던 한 시간이 매우 짧게 느껴졌는데, 혹여 그 와중에 네게 물어보고 또 대답하는 내가 세심하지 못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예기치 못한 올해는 진짜 끝까지 다 엉망진창인 것 같지만, 다시 따뜻한 바람이 불어올 거야. 나도 네 말에 에너지를 얻곤 해. 또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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