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생각] 사람은 고쳐쓸 수 없지만 망가뜨릴 수는 있다

과격한 제목이 되어버렸지만, 고쳐쓸 수 없다는 얘기는 성격이 바뀌지 않는다는 관용구인 것으로.
나의 성격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가 굉장히 오랜 세월 나의 명제였다고 생각된다.
MBTI를 배워 분석도구를 활용할 수 있게되기 전에도, 후에도 궁금했었고, 지금은 어떤 것을 보편적인 틀로 볼 것인지, 어떤 것을 경험에 의한 특수성으로 볼 수 있는지, 또 그 성격이 나의 선택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파악하며 시간을 보내다니 어찌 보면 내가 내 관심사인 셈. 그런 요소들을 나열하며 하나씩 간단히 글로 적어내고 싶은 마음이 뾰로롱 올라왔다 휘리릭 사라지는 경우가 조금 자주 발생하면서, 웬일로 일요일 밤 잠들지 않고 노트북을 열었다. 다만 첫 번째 주제는, 성격은 변하며, 그 원인은 물리적인 한계라는 지점이다.

아마도 출산을 겪으며 토해낸 지난 일기에 언급하지 않았을까 싶고, 누군가의 대화에 여러 번 써먹었던 꼭지인 듯 싶지만 다시 한 번 적어본다. 그렇게나 바뀌지 않을 것 같던 성격이란 것, 생활습성이라는 것이 변하고 만다. 내 정신을 담고 있는 그릇인, 육체의 한계가 올 때. '멍하니 있는 것', '잠깐만 쉬는 것'이 왜 필요한지, 굳이 왜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20대의 나는, 쉬는 시간에도 무언가를 보거나 읽거나 끊임없이 상상하였다. 그것은 요즘에 와서 쉬지도 않고 핸드폰을 켜고 게임을 돌리거나 8시간마다 무료 웹툰을 보는 것과는 굉장히 달랐던 시절이다. 어떤 시간도 허투로 보내기 아깝다고 생각했던 시절. 매일매일 무언가를 내 안에 '쌓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시절. 그것은 제일 먼저 2시간마다 수유를 해야 하는 쪽잠 생활로 무너지기 시작했고, 빼먹지 않고 분유와 기저귀를 조달하고 쑥쑥 커가는 몸에 맞춰 내복을 구입해야 하는 시기에 명백히 희석되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갈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홈페이지에서 홈페이지로 링크를 타며 외로움과 자괴감에 빠져들던 20대의 밤의 시간들과 달리, 가만히 누워서 스마트폰으로 업데이트 없는 한정된 앱을 왔다갔다 하는 시간은 나를 마비시키고, 시간을 죽이고, 내 체력과 멘탈 로드를 회복시켜주었다.그렇게 가만히 1시간씩 예사로 흘려보내는 내 자신에 자괴감을 느낄 때 남편은 그게 굉장히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해주었고, 처음으로 이럴 수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체력은 사람을 바꾸는구나.

무언가를 시작했으면 끝장을 볼 때까지 해치워야만 직성이 풀리던 성격 또한 금새 식어가기 시작했다. "오늘 일은 내일로 미루자"고 농담으로 되뇌이던 회사원의 결심 정도가 아니었다. 구석에 굴러다니는 먼지, 쌓여 있는 빨래, 끈적이는 타일 같은 것을 슬그머니 피해다니며 '못 봤다'고 치부하고 잊어버리자고 생각하기 전에 이미 잊은 상태로 변신할 수 있었다. 예전 같으면 하루 날 잡고 해치웠을 책상 정리 같은 것도, 한 칸씩 간신히 하고, 오늘은 여기까지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상대방과의 싸움도, 어떻게든 결판이 날 때까지 입씨름을 했었던 것이, 덮어두고, 넘어가고, 다음에 다시 생각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였다. 삼세번 발생하면 그때 가서 그때의 기분으로 고민하자고. 심지어 조금만 치열하게 머리를 돌리다보면 만화적 표현으로 푸쉬식... 하면서 사고회로가 멈춰버리기까지.

26살의 나는, 모든 것을 정비하려 했고, 모든 틈을 끼워맞추려 했고, 회사 일이나 사람의 일로 잠이 들지 못했다. 1년 후배에게 너는 어찌 그리 천하태평이어서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매번 치고 있느냐고 핀잔을 줬다. 어떤 일에 대해서 물을 때, 언제 누가 어떤 제목의 문서로 오갔었는지를 기억해서 바로 찾아낼 수 있었고, 팩트를 외우지는 못해도 사실관계와 방향을 기억해서 해결할 수 있었다.
36살의 나는 아웃룩을 굉장히 잘 활용하여 제목으로, 사람으로, 키워드로 검색을 해냈고, 10년 넘게 쓰고 있는 위클리 다이어리에는 다 적지 못할지언정 캘린더에 할일을 박아두고 잊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상사가 대화를 기억하지 못하고 전혀 뚱딴지 같은 지시를 내릴 때에는 성질을 내고 몇 번은 면전에다 뭐라 하기도 했었다.

40살의 나는, 메모를 집어 들고 읽을 때 팔을 쭉 뻗고 고개를 뒤로 젖히게 되었다.
한 화면에 쏙 들어오는 엑셀 셀 맞춤을 좋아하던 주제에, 글씨을 읽을 때는 화면 비율을 150%까지 키운다.
아이를 재우다 침대에 오면 2시간씩 시간 낭비하고 잠을 못 잔다고 투덜대던 내가 어디 갔는지, 10시부터 아침 8시까지 잠자고 만다.
척추와 관절과 근육의 문제로 허구헌 날 아프고 이제 25킬로에 육박하는 아이를 안는 것은 절대 금지인 건 둘째 치고, 
집에 진통제만 100정 들이를 병으로 사고 종류가 너댓 개인 것도 그렇다 치고,
이명이 왔다. 귀에서 냉장고 소리가 들린다.
무엇보다 나를 정신적으로 타격하는 것은, 진심으로 심각하게 기억력이 쇠퇴하고 있다.

출산 때문이다, 육아 이후의 멘탈 로드 때문이다 타령은 많이 해보았다.
외출할 때, 외출해서도 늘 뭔가를 빼먹고 다니는 것은, 남편이 2가지만 챙길 때 나는 10가지를 챙기려고 노력하다가 하나가 빠지는 거라고 말해보았다.
여행의 기억이 섞이고, 호텔방의 모습이 기억 안 나고, 친구들이 어울려 대학 시절 얘기를 해도 잘 기억나지 않는 건, 사람마다 남기는 추억이 달라서라고도 우겨보았다.
그런데 이제는, 업무 얘기를 하는데, "아 그때 그런 논의를 했었는데 결론이 어떻게 났었더라...."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런 대화를 했던 기억이 어슴프레, 한 정도를 넘어서 떠오르지 않을 때도 생겨버렸다.
엑셀 문서를 보다, 아 이건 이렇게 고쳐서 이런 식으로 작업해서 만들어놔야 하는데,,, 하다 저장하려고 폴더를 열면 이미 그렇게 '내가' 만들어두었다든가.
너무나 다양한 꼭지의 일을 저글링 하다보니 일일이 다이어리에 적지 않고도 생각날 때마다 처리하며 그러면서도 대략 놓치지 않고 관리를 해왔고. 인사의 특성상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그 문제가 되었던 일을 기록하지 않고 머리로만 저장해두는 일이 적지 않은데. 큰일이다.
조만간 CPU고 RAM이고 다 느려지고 망가져서 자기가 시킨 일을 기억 못했던 그 상사처럼 되어버리는 게 아닌지.

I know what you're going through, because I'm like you. You're so driven. You feel guilty when you are doing nothing and you tend to do more when there's less.
Now I know that somethings you should just do nothing. Just 'chill' and relax yourself.

이 수많은 변화 속에서도 내 변하지 못한 성격을 강타했던 "먼 윗선에서 내려온, 하등 일상에 가치를 부여하지 못하는 탁상행정의 끝판왕인 서류 작업" 때문에 심각한 번뇌에 휩싸였을 때, 레바논 상사가 해준 말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다. 네 성격이 그래서 그래. 좀 쉬어도 돼. 좀 널럴히 해. 지금 생각해보니 전 직장에서의 전무님도 그랬다. 너무 열심히 일하지 말라고.

"이명은 돌발성 난청이 아닌 이상 다 피로와 스트레스 때문에 그래요."
"하지만 그렇게 힘들지 않은걸요. 요새 재택이라 집에만 있고... 일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고... 딱히 아프지도 않고..."
"본인은 아니라고 생각해도, 몸에서 힘들다고 신호를 보내는 거예요."

지쳐가는 몸이, 성격을 누그러뜨린다고 생각했는데.
아이가 잠든 밤에도 스트레칭을 하지 않고, 맥주를 마신 채로 잠들어, 점점 허약체가 되어가는 나.
예전만큼 열심히 하지 않는데, 기억력을 잃고, 돌파력도 능력도 잃어갈지 모르는.
100세 시대라는데, 벌써부터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런 일기를 쓰고 있으면서도 운동은 하기 싫은.
사실은 성격이 몸을 망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몸도 성격도, 고치지는 못하고 서서히 망가져간다. 
이런 결론을 쓰려고 제목을 지은 건 아니었다고!!!!

by kisa | 2020/05/24 23:26 | I reckon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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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Lon at 2020/06/05 17:18
으앙.. 나는 점차 안주하다가 이래선 안되겠다는 위기감은 드는데 편안함에 익숙해진 몸이 움직이기를 주저해.
과거가 나한텐 너무 치열했어서 그런가.. 스트레칭도 운동도 안하고 그냥 사는데 이젠 안되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역시나 실내자전거는 가방 걸이.. ;ㅁ;
Commented by kisa at 2020/06/14 11:11
너에겐 아직 5년의 젊음이 더 남아있단다.... 갈수록 게으름으로 인한 파국의 치료는 돈으로 환산됨...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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