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반일의 전업주부 체험기

만 2년 준이를 돌봐주신 이모님이 추석 연휴를 맞아 중국에 다녀오신다. 해서, 연휴 토일월화수 플러스 목금, 플러스 토일, 도움 없이 육아. 그 중 남편도 없이 완전 나홀로 목금.
이틀간 오전 재택근무, 오후 반차를 쓰기로 하고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그리고 실전에 돌입했다. 그야말로 전업주부 체험이다.

준이 재우면서 같이 잠든 덕인지, 밤새 열두 번쯤 일어나 이불을 덮어주며 깨긴 했지만 여튼 7시쯤 넘으니 눈이 떠졌다. 일어나긴 싫다. 미리 샤워를 해두면 시간을 세이브 하겠지만 꼼지락거리며 스맛폰을 좀 보다가. 준이 기상. 어제 사온 소세지빵을 먹겠다고 해서 오이랑 배랑 우유랑 같이 주고 일찍 아침식사 마침. 사촌형한테 받은 신기한 모래시계를 두고 양치랑 세수 시키고 옷 입기. ‘밥 치카 옷’ 다했으니 티비 들어주고 나는 샤워하러. 이불 정리 설거지 다 하고 산뜻한 기분으로 가겠다는 야심찬 계획은 벌써 틀어지고, 창문 열고 환기만 좀 시킨 뒤 간신히 도복이며 칫솔 수저통 물통 챙겨 평소보다 15분쯤 늦게 집을 나서 차로 등원시켜줌. 그 길로 옛날 집 앞 카페에 가서 차를 대 두고 카페라떼에 베이글 시켜 9:37부터 업무 시작. 지난 주 금요일 아파 쓰러져 빵꾸났던 일들을 수습하고 온 데 통화하니 금방 시간이 흐른다. 1시쯤 나와서 원래는 샤로수길의 팟씨유무를 먹으러 가려고 했는데, 왔다갔다 하면 시간 로스가 상당할 것 같아서 집앞 팟따이 발굴하러 노선 변경. 근데 차 놔두고 버스 탈 뻔함 -_-;; 익숙지 않아서.... 후진으로 언덕 아래로 차 빼다가 브레이크를 착각해 악셀을 밟아서 중앙분리대 박을 뻔함 =ㅂ=;;;;;;;;;;; 심장 떨어지는 줄 ㅠㅠ 발굴한 가게에서도 주차 넣고 빼는 것때문에 진땀 뺐는데, 맛은 별로.... 실망 ㅜㅜ 그렇게 집에 돌아옴.

오자마자 우선 노트북 열어두고 다시 메일 답장하고, 팀원이랑 통화하면서 먼지 닦기 시작. 워낙에 오랜만에 하는 거다 보니 눈에 밟히는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다. 평소 손이 안 가는 곳을 닦아 내고, 온갖 물건을 다 들어내고, 이불에 먼지를 돌돌이로 다 문지르고, 침대 밑까지 청소기 돌리는데 땀이 흠뻑. 시이나 링고를 노동요 삼아 일하는데 이를 갈며 무선 청소기를 사야겠다고 다짐. 흡입구도 더럽고, 구석이 닿지를 않네.
아무리 익숙지 않은 집안일이고, 평소보다 좀 더 꼼꼼하게 하기는 했지만, 청소기 하나만으로 이렇게 시간이 금방 흐를 수 있단 말인가. 애초에 걸레질, 빨래 걷기, 화장실 청소는 넣지도 않은 단순한 계획이건만, 시간이 모자라 아침 설거지는 저녁에 같이 하는 걸로 미룰 수밖에 없다. 한 30분 정도 땀만 식히면서 또 업무를 좀 하자, 준이를 데리러 갈 시간이 됐다. 오후 4:30.

자전거를 한 손으로 끌고 아파트 후문에 가서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기다리고 있자니, 다른 엄마와 아이들이 사방에 있어 비로소 그들의 일과를 공유하는 느낌이 든다. 노란버스에서 뛰어내려 달려오는 아이를 안아주며 행복의 냄새를 맡는다. 노란 태권도 도복을 입고, 노란 자전거를 달린다. 아파트 중정에서 빙글빙글 돌자니, 킥보드를 탄 4살 동생이 준이를 졸졸 쫓아다니며 제법 재미나게 논다. 일등에 집착하는 건 여전하지만, 새로운 행동, 새로운 말을 할 때마다 신기하고 뿌듯하다. 유난히 선선하고 쾌적한 날씨가 더 기분을 고양시킨다. 이런 시간이 하루 중에 가장 배부른 시간일까.

집에 돌아오니 어린이집 가방 속에 책이며 놀잇감이 잔뜩 들었다. 오늘은 책 내용과 연관된 보드게임이 있는데 재준이가 너무 좋아했다는 선생님의 메모가 있다. 주사위를 굴리는 간단한 보드게임인데 ‘엽전’이라는 딱지에 그려진 갓, 댕기, 짚신 등을 전부 설명하는 걸 보고 고슴도치 엄마는 놀라며 네 판을 연속으로 놀아주고, 다시 티비를 틀어주고 밥 차릴 준비를 한다. 해놓은 밥에 얼린 밥, 이모님이 끓여놓고 가신 된장에, 훈제 오리를 굽고, 오이를 썰고, 김을 하나 꺼낸다. 요즘 준이는 된장찌개홀릭이다. 식탁 위에서까지 보드게임을 하면서 투닥투닥 밥을 먹고 아침에 남은 배를 후식으로 주고, 간신히 설득시켜 목욕탕에 넣는다. 휴일에 아빠가 아주 재밌게 장난감 보물찾기로 놀아줬는데, 후유증은, 혼자 목욕놀이 하던 애가 이제 자꾸 엄마를 부르며 보물을 찾아보라고 시킨다는 거다 -_-;;; 간신히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통에 넣어놓기만 하고, 목욕을 마저 시키고 닦이고 입히고 양치 시키고. 벌써 밤 9시다. 양치 잘 한 상으로 타이머를 20분이 아닌 21분에 맞추고 심시티를 틀어준다. 간신히 설거지할 시간이다.

모든 걸 마무리하고 애한테 책까지 읽어주니 밤 10시를 넘겼다. 녹초다. 내가 하지 않던 살림에 손을 대니 필요한 것들이 눈에 보여, 수세미, 정전기 부직포, 돌돌이 리필 등을 주문하려고 했는데 다 모르겠고 내일 해야겠다. 아니, 내일은 과연 시간이 날까? 이대로 잠들면 내일 아침은 똑같은 일과가 돌아갈 텐데.
아무리 4시간은 업무를 했다고 하지만, 하원 후 시간만 보자면 아이와 놀아주고 밥 먹이고 씻겼을 뿐, 요리 하나를 하지 않았고, 티비나 패드를 쥐어주고서야 간신히 차리고 치울 수 있었다. 대체 진짜 전업주부는 애 둘을 데리고 어떻게 생활을 하는 것인지. 경이롭고 위대해 보이고, 평소 이모님이 설거지 마치고 소독기 돌리며 방에 들어가서 누우실 때 어떤 기분일지 새삼스럽게 이입하게 되는 것이었다.

다음 날은 요령이 생기기는커녕, 식사는 더 간단하게, 차는 몰다가 난간을 긁었고, 업무는 칼같이 4시간에 끊었다. 대신 태권도 가기 싫다는 준이를 어린이집에서 3:45에 데리러 가자, 아이는 너무나 행복해 했고, 근처 놀이터에서 반 친구들과 더없이 신나게 놀았다. 다경이 이후 제일 좋아한다는 서윤이랑 한 그네를 타고, 사마귀를 보며 신기해하고, 친구가 가져온 분필로 바닥에 낙서를 한다. 친구 엄마 대신 잠시 아이들을 돌보다가, 가져다 주신 야쿠르트를 마신다. 평소 이름으로만 듣던 아이들을 보고 할머니 엄마들과 인사를 하며 평소 아이의 일상이 더 선명하게 그려진다. 일년에 몇 날 되지 않을, 어제보다 더 좋은 날씨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가 아쉬움에 헤어졌다. 이 정도의 풍요로운 시간을 매일 느낄 수 있다면, 커리어와 수입의 절반을 내놓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금요일 밤, 닭강정과 함께 들이킨 맥주가 몸에 노곤노곤 스며든다. 전날 연구실에서 밤을 새고 오늘도 늦게 돌아온 남편과 잔을 부딪히고, 다시 한 번 10시가 넘어 아이 옆에서 기절하듯 잠든다. 주부는, 고강도의 육체노동이면서, 고난이도의 시간관리, 우선순위 설정과 멀티태스킹을 요하고, 감정노동도 겸하고 있다. 집안일을 하다보면 나는 찬밥과 남은 반찬을 먹자고 생각하게 되고, 어제 입은 옷을 그대로 걸치게끔 된다. 예전 어느 맘카페에서 전쟁이 났던 게시물의 상황처럼, 잠을 줄이고 티비 드라마를 봐서라도 보상을 받고 싶게 되는 것이다.

남편이 두 번쯤 “이제 슬슬 후회되지?”라며 이모님을 휴가 보내드린 나를 힐난하고 싶어했지만, 3일 정도야 철저한 마인드 트레이닝과 컨트롤을 통해 버텨낼 수 있다. 마치 한강을 수영해서 횡단할 때와 비슷한 자세다. 그리고 예상보다는 단순히 버텨내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입장에서의 관점을 획득하고, 판단을 재확정, 또는 재점검 하는 기회가 되었다.
무선청소기와 같은 일상을 편하게 해줄 도구의 도입. 출산 초기부터 바로 집안일을 아웃소싱한 판단이 옳았다는 것. 그리고 역시, 초등학교 입학 시점에서는 육아휴직이 아닌 시간단축근무를 하되, 이모님은 계속 모시고 나는 집안일이 아닌 아이를 돌보는 일만 해야 한다는 확신. 사람은 잘하는 일을 하는 게 훨씬 효과 효율적이라는 명제. 어떤 일이든 단순히 누구의 책임이니까, 비용을 지불했으니까 생각하지 말고, 이해하고 도와야 한다는 점. 최대한 여러 기회를 만들어 이따금씩 준이를 어린이집에 데리러 가보고, 태권도 대신 놀이터에서 놀게 해야겠다는 다짐.

by kisa | 2018/09/29 13:48 | I am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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