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분일기] 10/23 뿌듯

00:11~
목요일은 정말이지 일이 없었다. 수요일 다 정리해놓은 일들은 대부분-늘 내 업무가 그렇듯이- 안내장을 보내서 몇 일까지 답변을 보내달라, 라고 이야기해놓고 기다려야 하는 것들이었다. 그 마감이 금요일이었기에 사람들의 수강신청이나 일정 조정이나 의견 제시가 있기 전까지의 나는 손을 놓고 빈둥빈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할 일이 똑, 떨어졌을 때, 나는 책상 밑에 무슨 이민가방처럼 쌓아놓고 있는 강의 교재를 꺼내들었다. 본사에서 만들어진 교재는 학습자용, 강의자용 교재만 두께 10cm짜리 바인더인 데다가 온갖 재료랄까 양식이랄까 카드에 벽보에 심지어는 트럼프까지 들어 있는 킷트였다. 참으로 자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는데 문제는 자세하면 자세할수록 읽기가 지겹고 잠이 온다는 점이겠지...
일도 없고 조용한데 영어로 된 문장을 읽고 있으려니 졸음이 닥쳐와서 참을 수가 없었다. 벌떡 일어나 칫솔에 치약을 묻혀가지고 세면장으로 걸어간다. 세면장 앞에는 여성휴게실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수유실에 가깝지만. 긴 소파 하나, 1인용 소파 하나, 젖병 소독기와 냉장고가 있는 공간. 늘 밖에서만 쳐다봤지 들어가본 적이 없는데 오늘 드디어. 껌껌한데 소독기의 파란 불빛만 흘러나오는 게 느낌이 오묘하다. 휴대폰 알람을 15분 뒤로 맞추고 잠깐만 눈을 붙였다 상쾌하게 일어나야지! 싶은데, 그게 또 말처럼 안 된다. 자꾸 오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신경 쓰이기도 하고, 이것저것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뭉게뭉게 피어올라 눈을 감은 채로 오히려 정신은 말똥말똥해진다. 결국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벌떡 일어나 이를 닦고 자리로 돌아왔다.
결국은 퇴근 직전, 이랄까, 7시가 넘어서 내일까지 기다리기로 했던 설문조사를 지금 바로 닫아서 결과보고를 하라는 명이 떨어져 수선스럽게 엑셀을 돌렸다. 내내 한가하다가 갑자기 일이 닥치는 거, 그래 이런 것도 늘 있는 일이지 - _ ㅜ 그래도 오늘은 꼭 나가봐야 하거나 곧 죽어도 마쳐야 하는 일이 있는 게 아니라서 '저축'이라는 개념으로 늦게까지 자리에 붙어 있다가 두 분 과장님 대리님이 나가시고 5분 뒤에 일어섰다. 꼭 필요할 때 일찍 나가려면 가끔 이렇게 제스쳐를 취해줄 필요도 있는 것이다. 종종걸음으로 지하철역을 빠져나와 집 앞에서 언니랑 버섯칼국수에 따숩한 유자차, 그리고 만화책 잔뜩. 참으로 푸근한 저녁이다.

금요일, 엊저녁 하다 만 설문조사 결과를 뽑아내고, 살살 하나씩 대기중이던 일을 풀어나가야 한다. 만, 사람들에게 마감을 금요일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금요일에 그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랄까. "오늘까지만 해서 주면 되지?"라는 건 그들이 퇴근하는 6시가 될지 8시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그래도 쌓여있는 더미에서 하나씩 살곰살곰 빼내듯이 일을 처리한다. 너무 할랑하지도 않게, 너무 정신 없지도 않게 하나씩 빼나간다. 전화를 걸면 꼭 받지 않는 곳에는 메모를 남겨 다음 전화를 기다린다. 어떤 일이든 시작에 끝이 붙어 있는 네모난 블럭이 아니라, 갈고리로 연결되는 사슬이란 느낌이다. 해놓고, 다른 걸 하고, 기다리고, 다른 걸 하고, 확인하고, 보내고, 다시 기다리고. 그렇게 상무님이 요구하기 한 템포 먼저! 라는 느낌으로 "나 일 열심히 하고 있어요"란 티도 내주면서 일하고 있었는데, 깜빡하고 월요일 아침 교육 하나를 빼놓고 있었다. 퇴근 시간이 다 되었는데! 서둘러 자료를 뽑고 강사와 약속을 잡고. 그 와중에 커뮤니케이션 하며 굽신굽신. 탁탁탁탁 쳐내고 나서 좀 주저주저하다가 제일 먼저 일어났다. 오늘은 대학원 수업이 있는 날이다.

환승통로를 가득 채운 사람들의 뒷통수만 보며 휩쓸려가 도착한 학교. 8시부터 9시30분까지 강의를 듣고 나서는 발표수업 준비 때문에 도서관 복도에서 노트북을 켜놓고 셋이 머리를 모은다. 셋이 비슷한 또래의 동기라는 점은 무지하게 강력하다. 좋은 발표를 하고는 싶으나 남이노는데내가떠맡기는싫고가능한한덜귀찮은선에서그래도좀볼만하게하는데되도록그룹에서튀지는않고너무아무것도안한다는인상도주지않는헉헉 그런 식의 게임을 하려면 정말 피곤한다. 우리끼리 한 조가 되니까 다들 바쁜 시간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일단 확 쏟아내어놓고 그 안에서 단번에 핵심을 건져서 재배열하고 그 안에서 언제까지 각자 무엇을 할지 확 정하니까 50분도 안 걸려서 발표의 틀이 잡힌다. 이 얼마나 효율적이고 쌈빡하고 좋은가. 귀찮아지기 전에 내일 정리해서 해치워야지.

감기가 크게 괴롭지는 않은데 결국 한 싸이클을 다 돌고 있다. 살짝 알레르기도 있어서 간질간질해 죽겠다. 앗싸리 재채기를 팍팍 하면 좋겠는데. 덕분에 주말은 크게 무리하지 말고 쉬어야겠다. 다만 일요일엔 토익 시험이고 아까 동기 오라버님이 번역을 도와달라고 했고 발표 준비 한 삼사십 분 해주고 하우스 5화 보고 휴대폰 새로 사고 영화표 써야 하지. 외할머니댁도 아직 못 갔고 할인혜택을 위해서는 카드 실적 정리도 해야 하는데 그건 좀 나중에 생각하자. 11월달 무슨 운동 시작할지는 그래도 한번 알아봐야겠다.

어쨌거나 내일 늦잠 자도 된다는 생각을 하니 맘이 편하다. 아직 안 본 만화책도 몇 권 쌓여 있으니 이 얼마나 행복한지.
나름 뿌듯한 주말 밤이다.
~00:37

by kisa | 2009/10/23 23:59 | I am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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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Lon at 2009/10/24 00:43
토요일엔 휴일인거구나. 오늘은 푹 쉬어~
Commented by kisa at 2009/10/26 00:54
Lon> 어제도 오늘도 잘 쉬었네. 낼 출근하려면 얼릉 누워야 하는데 토욜에 심히 늦잠을 잤더니 잠이 안 와;; 그래도 오늘은 힘겹게 아침 일찍 일어났는데. 어차피 잠을 푹 못 자고 있어서 그런가 - _ -; (자봤자...라는;)
Commented by mandoo at 2009/10/24 21:46
몹시 뿌듯하구려. 발표의 틀을 50분 만에 잡다니.. 올레~!
아아, 이미 한바탕 회사생활을 겪은 kisa양, 일도 적당히 알아서 착착. 눈치껏 착착. 대단해 짝짝.
Commented by kisa at 2009/10/26 00:55
mandoo> 올레~! 근데 정리해서 보내줘야 하는데 안 하고 있네.
"적당히"와 "눈치껏"에 포인트를 넣어주어서 고마워 히히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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