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분일기] 10/20 살 만하다

- 사거리의 고층빌딩에서 근무한다는 것의 특혜는 바로 이런 하늘을 볼 수 있다는 점.-

9:18~
내가 집에서 나오는 건 대략 8시 17분. 마을버스와 지하철의 배차 간격, 그리고 인해에 얼만큼 떠밀리느냐에 따라 소요시간은 조금 달라지지만 회사에 도착하는 건 대략 8시 45분 전후이다. 월요일이라 먼 곳 사시는 분들이 완전 일찍 와 계시지 않을 때면 거의 내가 가장 먼저 출근한다. 저녁을 밤 늦게 먹었을 때가 많고, 아침 이동 거리도 얼마 되지 않으며, 점심 시간까지의 간격이 짧기 때문에 주로 아침은 우유 하나로 해결한다. 오늘은 처음으로 시리얼 우유를 시도해보았다. 검은콩우유나 별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좀 덜 달았으면 건강에 좋다고 스스로를 속여볼 수 있었을 텐데.

어제 약속 때문에 남들 다 있을 때 좀 일찍 나갔기 때문에 오늘은 늦도록 일하는 분위기를 피워보려고 작정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까지 급한 일이 없어 <오늘 할 일은 내일로 미루자> 모드가 벌써 작동되기 시작했으므로 어떻게든 시간을 죽여야 한다. 일단 근무종료시간인 5시반이 넘자, 아직 다 낫지 않은 인후염을 고치러 이비인후과에 들렀다가 퀴즈노스에 들러 알파인 치킨 세미스를 하나 포장해서 들고 왔다. 과장님은 상무님과 회의중이시고, 약속 있으시다던 대리님 혼자 일하시는 중. 냠냠 다 먹고 나서 아까 하다만 서류 정리를 다시 하기 시작했다. 캐비넷 안에 두서 없이 쌓여 있던 것 중에서 뭐 하나를 찾다가, 결국 전부 꺼내서 완전 분류하여 깔끔하게 채워넣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걸 다 하고, 찾아놓은 두 개 중에 하나의 일거리를 다 했는데도 과장님은 나오시질 않는다. 알고보니 대리님과 다른 동료분들과 저녁에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었는데 다 빵꾸났나보다. 꼭 상무님한테 붙들렸다기보다는, 이야기가 시작되고 보니 중간에 멈출 수가 없어서 근 2시간째 끝나질 않는 거다. 나는 사뿐히 메일을 한 통 보내고 짐을 챙겨 일어났다. 나름 야근 제한 시간인 8시까지 버틴 것이다.

잠시 언니를 만날까 하다 타이밍이 틀어져서 집에 가는 버스를 탔다. 몸이 나른하고 졸려서, 겨우 3 정거장인데도 꿈을 꾼 것 같다. 집에 오니 8시 30분밖에 안 되었다. 이 시간에 퇴근해서 집에 바로 들어온 건 입사 후 처음인 듯, 왠지 감격스럽다. 아버지는 야구를 보고 계시고, 어머니는 몸이 안 좋으셔서 누워계신다. 요즘 병원에 드나드시는데 꽤 걱정이다. 두 분 잡수신 설거지를 하고, 냉장고에 꽤 오래 묵어 있던 포도를 꺼내 하나를 씻고 하나는 버려야만 했다. 의식적으로라도 부모님이 집에 계실 때는 그 옆에서 이야기를 들어드리고 또 나누려 한다. 저녁 시간에 과일을 먹은 것도 대단히 오랜만인 것 같다.

어제는 옛 직장, 그것도 원년 시절의 멤버와 모여 내가 퇴직 턱을 쐈다. 처음에는 한둘 빠진다 해서 섭섭했지만, 나중에 또 합류하고 해서 결국 배 터지게 먹으며 조용한 가운데서 이야기도 오래 나눌 수 있었다. 나는 목도 아프고 해서 거의 그들이 지금 그들의 조직에 대해 나누는 대화를 듣고만 있었지만, 그것도 무척 좋았다. 가지각색의 캐릭터가 배구공을 튀기듯 서로 말을 주고받는 템포랄까, 이야기의 흐름 자체가 신나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이야기도 모르는 이야기도 섞여 있었지만, 쓸쓸함 같은 것 없이 무척이나 포근한 느낌이어서, 옛 것에 대해 이렇게 따뜻하고 편안하게 되돌아볼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그리고 이직을 시작한 이상 과거 넘버 원, 과거 넘버 투가 되는 게 아니라, 이들은, 내 첫 멤버들은, 언제까지나 원점이라는 특별한 위치에서 자리매김하지 않을까, 그러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다.

나른하니까 왠지 조곤조곤한 말투. 사진 올린 지 너무 오래 돼서 휴대폰에서 몇 개 뽑았다.
- 우리 회사는 의류 판매를 하지 않지만, 판매권을 가진 곳으로부터 1년에 한 번 정도 할인권을 받는다.
추석 연휴, 처음으로 가본 매장 한 군데서 등이 쫙 파진 드레스가 맘에 들어 입어봤으나 역시 입을 일이 없더라.
차라리 탑이었으면 청바지 위에라도 입을 텐데.-
- 3월부터 할까말까 고민하던 파마를 10월에 했다. 여행 가기 전과 같은 스타일. -
- 한 달 만에 간 학교, 승미 언니랑 현주 언니랑 들른 달팽이. 다분히 보헤미안 정신에, 음식도 배경음악도 훌륭. -
- 못 와서 미안하다며 원년멤버 왕언니님이 보내주신 선물. 뜻밖의 선물은 그 마음이 한결 묵직하게 느껴진다.-

by kisa | 2009/10/20 21:42 | I am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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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사은 at 2009/10/21 03:57
으흐, 읽는 사람에게는 하루가 팍팍 느껴지는 효율성 만점의 15분 일기. >ㅁ<
Commented by kisa at 2009/10/22 11:47
사은> 쓰는 사람도 써놓고 뿌듯한 에헤헷☆ 나두 핸폰으로 사진 찍고 바로 사진 올리고 이런 거 많이 해보면 좋겠어 =ㅅ=;
Commented by Enigma Box at 2009/10/21 09:03
오랜만에 만나 반가웠어. 그렇게 긴 시간동안 이야기 끊김 없이 편안하게 수다를 떨어본게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했는데...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재미있는 사람들은 어떤 조직에서 어떻게 만났냐보다는 어떤 사람들로 계속 남을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준 자리였다니까. 근데 8시 45분에 출근했는데 5시 30분이 근무 종료시간? 어차피 얘기를 들어보니 근무종료시간과 퇴근시간은 관계 없는 것 같지만 어쨌든 규정상으로 하루 7시간 30분 근무??
Commented by kisa at 2009/10/22 11:49
EB> ...너 그동안 많이 외로웠구나 ㅎㅎ 형들하고만 놀았다고?
시작도 중요하지만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는 말에 동감. 그리고 규정상 7시간 30분 근무 맞다네 으하하하
반차도 화끈하게 12시까지 혹은 1시부터... 내 남은 연차는 어떻게 하지 =ㅛ=;; 연말에는 사무실 지켜야 하는데 ㅠ
Commented by Lon at 2009/10/21 09:23
퀴즈노스, 강남 주민 오빠한테 소개받았는데, 거기 크램차우더 좋더라.
친구랑 가끔 가는데, 여기서 보니 반갑네.
바쁘면 더 열심히 하루를 보내는 것 같고, 나는 너무 노는 것 같구. 그래. 에헤헤. ;ㅁ;
Commented by kisa at 2009/10/22 11:51
Lon> 오 크램챠우더 좋드나? 강남역 근처에만 세 개 정도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먹은 데는 좀 짰어.
난 메가박스 앞에서 KTF 20% 할인 받고 영화표로 공짜 음료수 받을 때가 제일 좋았는데.
최근엔 살짝 여유로워진 시간을 만끽하기 위해 애쓰는 중이야 캬캬캬
논 만큼만 열심히 하면 다 잘 될 거야!
Commented by mandoo at 2009/10/23 13:11
핫핫, 등이 파인 드레스를 입을 일이 있을까!?!?
왠지, 수다 한 탐이 필요 할 것 같은 일들이 보이는 것 같아..?ㅎㅎ

파마 잘 어울려>_<~
Commented by kisa at 2009/10/23 14:27
mandoo> 없겠지 - _ -
우리 만나야지! 너도 받고 싶은 생일 선물 귀띔해줘...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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