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02일
[일기] 우리 회사
우리 회사의 좋은 점:
가깝다. 강남역 출구 1분 거리. 9시 정각까지만 출근하면 되는데, 가끔 그 시간 넘겨 출근하시는 분들도 계신다. 그래서 예전 회사 다닐 때보다 더 늦게 나와도 된다.
첫 날 소문으로만 듣던 "출근 시간 2호선 지옥철"을 경험했을 땐 왠지 뿌듯했다. "우와... 전철 타고 출근하긴 첨이야!" 마을버스 두 정거장, 지하철 두 정거장이라 잠시간의 고문은 "안 보여 안 들려" 노하우로 극복할 수 있다. 맨 마지막에 타서 첫 번째 역에서 내렸다가 다시 타고, 그 다음 역에서 내려버리면 되는 것이다. 탑승 위치는 9-2.
자유복이다. 비즈니스 캐쥬얼도 아니고, 심지어는 나시도 된다는데? 너무 짧거나 너무 파이지만 않으면 된단다. 청바지 만드는 회산걸. 대세는 청바지에 플랫 슈즈. "그래도..."하면서 첫날 블라우스에 정장 치마 입고 갔는데 완전 후회했다. 완전 자유롭다.
여성 비율이 95%다. "남자가 한 명도 없는 섬에 갇히게 된다면 여자가 짧은 치마 같은 걸 입을 것 같아? 결국은 보여주기 위해 입는 거라고!" 따위의 말에 동조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역시 출근 며칠 만에 까놓은 앞머리와 질끈 묶은 뒷머리는 기본 셋팅이 되어버렸달까...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은 챙기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잊으면 된다.
-- 이 "젊은 여성이 대부분"이라는 점은 사실 일상적인 면 이외에 업무적인 면에서 큰 영향을 미친다. 회사 입장에서 무언가의 제도를 만들고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이벤트로 기획할 때, 타겟의 다수가 한 가지 속성을 지닌다면 거기에 집중해서 최대의 효과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체육대회를 해도 누군가는 재밌어 하지만 누군가는 지루해하여 이 사람을 위한 거 조금 저 사람을 위한 거 조금 섞다보면 이도저도 아닌 게 되어버리는 일이 적고, 추석 선물을 골라도 기념품을 만들어도 모두에게 맞추기 위해 누구에게도 맞지 않게 되어버리는 일을 피하기 쉽다. 내 업무인 교육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또 여성 멤버끼리 일을 하다보면 세세한 부분을 챙기더라도 통하는 게 있고, 쓸모없는 소모전이 줄어들 수 있다. 체육대회 준비에 임신한 여성 제외와 수유실 마련이 기본사항 중 하나라니, 멋지지 않은가.
외국계 회사는 일단 사무실이 삐까뻔쩍해서 좋다. 리셉션부터 기능적인 회의실까지... HR팀은 유리문이 달린 룸 안에 따로 분리되어 있다. 바닥은 카페트지만 다행히 모 건물처럼 냉난방이 발바닥쪽에서 세상의 모든 먼지와 함께 뿜어나오지 않기 때문에 공기도 나쁘지 않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도 그보다 똑똑해서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우리 회사의 아...쉬운 점:
원래는 둘을 목록을 비교하면 사실 장점이 전부 단점도 된다는 그러한 얘기를 적어보려 했으나 요즘 두뇌 회전율이 급격히 저하되어 마찰 없이 구동시키는 것만으로도 에너지가 소모되므로... 패스. 단 야근이 너무 많아서 회사 측에서 강제로 8시에는 퇴근하도록 원칙을 세웠으나 그 탓에 9시30분만 넘기면 타도 되는 택시를 이젠 탈 수 없게 되었다는 것과 일을 더 해놓고 맘 편히 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야근은 계속되어 저녁식사 시간이 9시 혹은 10시로 미뤄지고 있다는 점만 밝혀두자. 심지어는 "굶고 일할래 밥 먹고 집에 갈래"(앞뒤 바뀌지 않았음)라는 선택을 종용당하고 있다.
일이 많다. 1년에 한 번 있을 이벤트가 줄줄이 이어진다. 1년에 한 번 본사에서 진행하는 교육, 1년에 한 번 사장이 각국 사람들을 초청해서 하는 세미나, 1년에 한 번 체육대회에다가 1년에 한 번 추석 명절... 심지어는 회사 창립자께서 향년 81세로 지난주에 별세하셨다. 태생이 외국계라 그런가, 할로윈 데이 이벤트까지 공지로 떴다...... 그래, 이런 큰 행사면 당연히 이 정도 신경 쓰고 야근할 수도 있지! 그런데 왜 이렇게 줄줄이 사탕이냐고! 난 아직 사방 천지 영어에도 적응을 못해서 메일 하나 쓰는데 한참이 걸리고 컴퓨터 시스템에도 익숙하지가 않다고!
진짜 재밌는 게, 외국계 회사는 정말 상상도 못한 선진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는데, 그 선진이, 20년 전의 선진이란 점이다. 얘네들은 이 시스템 20년 전에도 썼을 거다. 그땐 진짜 하이 테크놀로지였겠지. 근데 지금은 회사마다 온라인 웹 기반 위지윅 인트라넷을 구축하는 시대가 아니더냐. 아웃룩 하나로 사용할 수 있는 기능이 이토록 많다는 사실은 분명 경이롭고 그것이 지금 돌아가는 데에도 전혀 무리가 없다는 사실이 더욱 경이롭지만, 경이가 야근 시간 단축시켜주진 않는달까. 미국 본사의 프린터 하나까지도 전부 네트워크로 확인할 수 있고 전화 걸려온 상대의 이름이 뜨는 전화기에 툭 하면 범세계적 컴퍼런스 콜을 하는 것과 다분히 미국적인 일처리 방식은 그들 표현으로 "임프레시브"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네트워크가 그리 연결된 덕분에 인터넷은 무지 느리고, 그 인터넷도 패스워드 부여 받아 인증방식으로만 접속이 가능하고, 회사 컴퓨터에는 어떤 프로그램은커녕 어플리케이션도 깔 수 없기 때문에 인터넷 뱅킹은 단 두 대의 공용컴퓨터로 소화하기 때문에 메신저는 꿈도 꿀 수 없고 업무 시간에는 오로지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정말이지 똑똑하지......!
가장 슬픈 건, 마음이 가난하다는 거다. 야근식대가 4000원이라니 이런 뭥미...... oTL 실컷 힘들게 일했는데 강남 한복판에서 야근식대 4000원인 게 신경쓰여 결국 버거킹에서 와퍼도 아닌 쥬니어와퍼세트를 시켜 내 돈 700원 더 내고 밤 10시에 혼자 먹고 집에 가면 그만큼 서글픈 게 없다...... 아니 뭐 내가 기분 좋기 위해 그깟 돈 천 원 이천 원 더 쓸 수 없을 것도 없는데 그렇게 쉽지도 않단 말이지...... 당장의 미션은, 회사 근처의 싸고 먹을 만한 식당을 찾는 것과, 하루빨리 시스템에 적응해서 일을 빨리 끝내고 집에 가는 것이다. 일단 공식적인 근무시간은 5시 30분까지란 말이지!
일하면서 나와 내 환경의 변화에 대해 쏠쏠히 느끼는 것들이 있어서, 그런 게 오히려 내 자신의 성숙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과장이 인수인계 대강 하고 튀었을 땐 뭐 이런 4년 전과 완전 똑같은 상황이 다 있어 쉑-스런 심정이었지만, 그 상황에서 패닉하지 않고, 조바심 내지 않고, 차분하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모르겠는 건 모른다고 하고, 일을 두 번 하지 않기 위해 확실히 처리하고, 어쨌거나 집에까지 일을 끌고 오지 않고 휴일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건 발전이 아닐지. 약간의 미스를 저질렀을 때도, 그 사실 때문에 정신을 놓지 않고 할 수 있는 부분까지 해결한 뒤 차라리 잘 되었다, 더 큰 실수를 하기 전에 이것으로 경각심에 예방할 수 있게 되어서-라고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그래도 언니는 항상 웃고 있어서 참 좋아요-"라고 동기인 아이에게 들은 말이 참 위안이 되었다.
일단 다음주의 이벤트와 그 다음주의 이벤트와 그 다음주의 이벤트까지만 소화하면 한숨 돌릴 수 있지 않을까나 :D
아직 끝나지도 않은 재택알바와 교육+인수인계+이벤트의 러쉬에 초 하이 텐션으로 진행되어 숨도 막혔지만, 사실 그런 때 진짜로 업그레이드 되긴 하니까. 한 달만 버티면 훨씬 쉬워질 거야, 하고 위안하며. 추석연휴 앞뒤로 강제로 1일씩 쉬게 하여 야근은 괴로웠지만 이런 휴식이 있어주는 게 어디냐 생각하며.
# by | 2009/10/02 23:59 | I am | 트랙백 | 덧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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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하게나 화이팅~
PS. 선물 http://eldlan.egloos.com/5080759
(주변 사람을 상대적으로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우리 고마운 만두양... 퍽퍽퍽)
언제 강남에서 저녁이나 먹자꾸나~ 강남대로 안 막히는 날 ㅋㅋ
은이는 추석 때 뭔가 하나? 잘 지내고 있기를!
왜 서러운 인생사에 날 보고 위로삼나연.. 후..
전 그런 사람 아닙니다.(정색)
그나저나 강남바닥에서 4000원으로 저녁값이라.
길거리 떡볶이도 배터지게 못먹을 돈이구만..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