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고추는 출아법으로 증식한다

하기 싫어서 몸을 배배 꼰 것은 당연하지만, 어떻게든 주어진 시험 범위를 읽고, 요약하고, 또 요약해가며 외워 대학원 논문자격 종합시험은 무사히 치렀다. 연휴 전날 저녁 7시 40분, 강의실에 들어서 수험번호대로 일렬로 앉아 필기구만 남기고 책상을 정리한다. 다섯 장짜리 시험용지를 받는다. 대학 시절보다 살짝 작고 종이질은 심하게 좋다. 전공별로 A4용지에 복사된 시험지가 배부되었는데 이상하게 장수가 많다. 3문제 중 2문제만 쓰면 되는 거라며 이 교수님! 다른 두 과목별로 2문제씩 총 4문제를 쓰라고 되어 있다. 왜 하필이면 두 과목? 전공시험이면 다른 과목까지 다 보든지, 과목 상관 없이 통합으로 보든지. 이해할 수 없음과 당황스러움에 웅성웅성, 하지만 이런 소란에 아랑곳하지 않고 초침은 똑, 딱, 똑, 시험 시작. 1시간 20분 동안 3번 문제를 30분. 4번 문제를 25분, 그리고 1번 문제를 10분, 2번 문제를 8분간 쓰고 연필을 내려놓았다. 분량 차이가 엄청나다. 얼마나 열심히 제대로 외우고 있냐에 따라 문장의 질이 다르다. 그러니 아무리 아는 척 돌려써도 교수님들은 다 알아본다니까. 어쨌든 팔 저리도록 열심히 했다. 끝!

뒷풀이를 한다는 동기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나와서 난 열심히 지하철 버스를 타고 아무도 없는 집에 온다. 오늘은 케이블에서 <하이스쿨 뮤지컬2>를 해주는 날이다. 지난주에 운 좋게 1을 봤는데 재밌더라. 남미여행 도중 3를 무지막지하게 광고하는 걸 보면서 '저렇게 유명하고 3편인데 왜 전혀 들어본 적이 없을까' 궁금했는데. 전형적인 미국 고교 생활의 모습과 그 속의 인간 관계 갈등 이런 걸 소재로 삼은 발랄한 오페레타다.

다음 날은 놀자판. 이미 지난주부터 시험공부보다는 시험 끝나고 놀 준비에 열중했었다. 언니와 압구정에서 만나 전에 봐두었던 지유켄에서 카레볶음밥을 먹었다. 오사카 쪽에선 유명하다던데, 꼬들꼬들하고 맛있다! 가격 대비 훌륭한 맛에 밀가루가 아니니까 심신에 부담도 덜하고. 앞으로 이 근방에선 무조건 여기다. 1시 영화는 <썸머 워즈>. 고ㅅ톱으로 세상을 구한다는 이야기 ㅎㅎㅎ 발랄하고 심히 좋다. 특히 삼촌의 그 테이크는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훌륭한 대사 전 1초 뜸들이기였다. 영화가 끝나고 바로 강남으로 이동, 사쿠라군과 <지.아이.조>를 보고 민쓰군과 합류해 주말 강남역에서 손님이 단 한 명도 없는 술집에서 맥주 마시고 떠들다 간만에 노래방까지 ㅎㅎ 떠드느라 목이 쉬어서 노래방에서 소리를 못 지른 게 못내 한이 되었다.
이렇게 놀고 당연히 주말은 집에서의 봉사 시간. 일요일 새벽 나를 깨우신 엄니를 따라 신원리에 갔다. 고추 수확의 계절이다. 우선 1차로 따서 묵혔다가 이장님 댁 기계에서 이틀 반동안 말린 고추를 뜨거운 햇빛 아래 펼쳐놓는다. 점심 땐 무조건 쉬어줘야 한다. 저 작열하는 태양 아래 움직였다간 픽 쓰러질 수밖에 없다. 태양이 사그라들길 기다리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긴팔 긴바지 양말에 부츠를 신고 모자를 쓰고 썬블록을 바르고 모기 퇴치 스프레이를 뿌리고 거대 우산을 들고 나섰다. 일단 나의 임무는 싸모님을 태양으로부터 지켜내는 것으로 했다. 졸졸 쫓아다니며 고추밭 사이에서 각도를 잘 맞춰 자외선을 차단한다. 습기까지 푹푹 찌는 여름의 밭에서 햇빛을 가리고 안 가리고의 차이는 대단히 크다. 이윽고 태양이 패퇴하기 시작하면 나도 우산을 내려놓고 고추 획득에 동참한다. 나중에 꼭지를 똑똑 따내기 좋은 적당한 길이에서 가위로 싹둑싹둑. 너무 짧으면 한 큐에 떨어지지 않고, 너무 길면 기계에 넣을 때 무게가 늘어난다. (농업용 전기는 보통 전기보다 싸서, 1kg에 500원꼴로 전기세를 이장님 댁에 드리고 기계를 사용한다고 한다.)

이장님댁 사모님 말씀에 의하면, 하늘님이 우리더러 앞으로 농사 열심히 지으라고 첫 농사를 이렇게 실하게 해주셨는지, 이건 숫제 고추가 아니라 당근이다. 최소한 소세지만큼 탱탱하고 윤기가 좔좔 흐르는 새빨간 고추. 초록인 부분이 조금도 남지 않고 주황색을 넘어서 검을 정도로 붉은 빛이 확실한 놈들만 골라낸다. 유심히 살펴보다보면 이상하게 생긴 놈들이 있다. 꼭지 부분에 조그맣게, 피망처럼 쭈글쭈글, 그러나 확실한 고추 모양이 달려 있는 거다. 작게는 5mm, 크게는 1cm. 뭐지 이건? 어떻게 열매가 맺히면 이렇게 되는 것이뇨? "엄마 엄마, 이게 뭐지? 이분법? 아니 그건 아니고. 아메바 뭐더라. 그래 출아법 같아!! 사실 고추는 남몰래 출아법으로 증식하고 있는 거였어 ㅎㅎㅎ" 이러면서 놀고 있는 모녀. 가끔 오렌지라든가 보면 속에 또다른 열매 모양이 있기도 한데. 고추가 이러는 건 처음 봤네.
고추를 씻기 위해 한 바구니씩 나른다. 양이 엄청나서 욕조에 쏟아부었다. 절반이 넘게 가득찬다. 어머니는 저녁을 준비하시고, 나는 고추를 씻는다. 욕조에서 박박. 대야로 옮겨서 복복. 그리고 흐르는 물에 하나하나 뽀독뽀독. 채반이 모자라서 가지런히 일렬로 세워 쌓는다. 집에서 난 감자와 당근과 고추로 카레를 만들어 한 그릇을 뚝딱. 다시 고추와의 싸움. 바닥에 넓게 쏟아놓고 수건으로 대강 물기를 훔치고, 작은 방에 깔아둔 신문지 위에 또 펼쳐놓는다. 자리가 부족할지 모르니까 또 열맞춰! 이렇게 하룻밤 재워둔 고추를 다음날 손수레에 실어서 아랫고개 이장님 댁으로 싣고 갔다. 다시 트레이에 펼쳐서 기계에 쏙. 지난 번 고추가 14kg, 어제 우리가 따고 내가 씻은 고추가 27kg이다. 징글징글. 농사가 너무 잘 돼서, 아직도 이만큼은 더 따야 하겠다. 그만큼을 또 햇빛에 잘 말려주면 태양초가 완성된다. 그걸 또 일일이 먼지를 닦아주고 꼭지를 따고 나서야 방앗간으로 보낼 수 있다. 그때는 꼭, 미국에서 놀러온 사촌동생들에게 귀중한 농촌 체험을 시켜줘야겠다.
더 이상 개학도 개강도 출근도 관계 없는 나인데, 8월말이라고 왠지 관성적으로 그간 못 봤던 사람들과 연락하여 약속이 줄줄이 잡혔다. 학교에도 놀러가고, 남미여행 친구도 만나고, 회사사람들도 만나고. 확실히, 무의미하게 시간이 펼쳐져 있을 때보다는 뭔가 맺고 끊음이 있을 때 시간을 잘 활용하게 된다. 뭐가 어찌됐든, 8월 말에는 워크샵이 있을 거고, 9월에는 개강할 것이다.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2차 면접날만 기다리며 3주째 기대의 반작용으로 가슴만 졸이고 있다는 사실도, 더 이상 내 휴직계에 싸인해줬던 팀장이 상무가 사장이 회사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앞일이 어찌될지 몰라도 충실히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할 때가 있고, 그대로 따를 때가 있다. 다행히도, 지금은 따를 수 있는 기운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

by kisa | 2009/08/19 21:45 | I am | 트랙백 | 덧글(10)

트랙백 주소 : http://kisa.egloos.com/tb/5045679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ziza at 2009/08/21 11:08
시험을 무사히 치룬것을 축하! 수고많았어요:D
알찬 하루하루를 보내는 모습이 보기좋구나~
Commented by kisa at 2009/08/22 21:09
ziza> 감사하오 >ㅁ< 요즘은 정말 격하게 놀고 있다 으하하
Commented by ziza at 2009/08/21 11:10
혹시 Queen을 좋아하니? 요새 Queen Rock Montreal실황 씨너스이수에서 상영중 관심있다면 꼭 봐봐요^^
Commented by kisa at 2009/08/22 21:09
ziza> 저번에 만났을 때 얘기해주었잖니 ㅋㅋ 아직도 하고 있구나!
Commented by ziza at 2009/08/24 13:04
헉..그랬던가..
요새 나란 인간..
한말 또하고 또하고..왜이러나 모르겠다..ㅠ.ㅠ
Commented by kisa at 2009/08/26 14:19
ziza> 우리 모두들 그래 너무 슬퍼하지마 왕언니...
Commented by nacre at 2009/08/25 08:39
크하하하 지자야 그얘긴 나도 들었답
Commented by kisa at 2009/08/26 14:19
nacre> 옹기종기 앉아 나름 즐겁게 감탄해가며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ㅋㅋ
Commented by mandoo at 2009/08/26 23:44
읭 내가 퇴짜 놓은 그날<- 이구나..ㅋㅋㅋ 지아이조를 봤구나. 관심 갖는 사람들이 많던데. 영화는 어땠는가?

고추가 매우 실하구만, 이거 원 이래서야 농사꾼들 먹고 살겠나요.ㅋㅋㅋㅋ
그나저나 출아법이라니, 고추는 효모와 같은 발생원리하에 있었구나. 고추가 곰팽이라는 새로운 학설 등장. 두둥.ㅋㅋㅋ
근데 저 출아고추는 매우 귀엽다..ㅋㅋㅋ
Commented by kisa at 2009/08/27 13:36
mandoo> 영화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완전 막장 스토리의 코믹 액션인데 역시 이병헌은 잘 했다는 것?
담에 우리 빙수 ;ㅁ; 여름 가기 전에 ;ㅁ;
출아고추 매우 귀엽지효 효효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