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피 플라이트 :: 추락하는 비행기에도 상영사고에도 웃음이

"해피 플라이트 보고 싶어!"

마감날까지 알바를 질질 끌고 있던 나는, 빽 소리를 질렀다. 괜시리 인터넷을 뒤적거리다보니 극장에서 "흥행몰이"란 문구로 광고메일을 보내왔던 것이다. 물론 한 번 볼까? 하고 생각했던 거지만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광고메일에 이렇게 낚이는 일도 잘 없는데. 보고 싶다. 지금 당장. 처음엔 이렇게 깔깔대는 영화는 누구랑 같이 볼까나 해서 가까이 있는 사쿠라군을 꼬셔보았지만 패스. 우왕. 어쩔까나. 다음에 봐야 하나? 그러나 "알바를 다 마치면 스스로에게 상으로 보여줘야지" 같은 사탕발림이 통할 분량이 아니었기에 "어차피 손에 안 잡히는데 일단 나가고 보자"란 심정이 되었다. "공짜표가 이번 달까지야!"라는 적절한 핑계도 있다. 게다가, "지금 당장 보고 싶어"란 마음에 실제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보러 갈 수 있는 이 유리한 입장을 언제까지 누릴 수 있을지 모르는 것 아니냐. 할 수 있을 때 실컷 만끽하기로 한다.

각오는 했지만 버스로 가는 길은 엄청 막혀서 졸다가 눈을 떠보니 시작 15분 전이었다. 잽싸게 극장 1층의 햄버거 가게에 들어가 꽉 채운 스탬프 카드를 들이밀고 기다리는 동안 표까지 찾아왔지만 시간이 모자라서 반만 먹고 반은 포장해서 극장에 뛰어들어갔다. 오늘따라 평소 안 오는 퇴근 시간대 영화라 가장자리 좌석을 놓치고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더니 조금 불편하다. 언제나의 "DVD방 관람 자세"가 안 나오잖아! (←불량관객) 왼쪽은 커플, 오른쪽은 덕후(추정). 눈치를 보다 나머지 반쪽을 꺼내어 먹었다. 속이 줄줄 흘러나오고 손가락은 소스로 범벅. 그래도 안 먹고는 못 살아!
영화는 신입 스튜어디스인 아야세 하루카가 동경하던 국제노선에 처음 타고 선배 스튜어디스들의 감춰진 모습을 발견하는 우여곡절을 전면에 내세운다. 여기에 부기장인 타나베 세이이치는 기장으로 승진하는 테스트 비행이라 엄격한 감독관 기장 옆에서 완전히 긴장상태. 얼핏 보면 비행기 안에서 벌어지는 우왕좌왕 좌충우돌 코믹 해프닝이 전부인 것 같지만 영화는 생각보다 더 넓은 범위를 다룬다. 비행기 한 대를 띄우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든 이들. 관제탑, 지원실, 정비반, 지상스탭들을 두루 보여주는데, 맡은 일에 익숙해져 있는 모습이나 그에 어울리는 성격까지 보여주는 게 전부 웃음의 요소다. 마이크를 껐다 켰다 방송하면서 동시에 수다를 떠는 관제탑 직원이나, 공항 활주로 및 주차 배치가 업무인 이들이 초콜렛 비행기를 가만히 두지 못하는 직업병 같은 것들.
마케팅 상으로는 포스터의 두 인물을 탑으로 내세웠지만 내용상으로는 캐릭터 하나하나를 지극히 사랑스럽게 보여주는 듯. 그중에서도 난 지상 근무하는 이 두 아가씨가 제일 좋더라 > ㅁ < (일본식의 혀짧은 말투가 이렇게 귀엽긴 또 처음이다 ㅎㅎ)
"만날 똑같은 일의 반복에, 새로운 만남도 없는 이런 직업, 그만두고 싶어!"
"왜여 선배~ 그래두 가끔은 연예인도 볼 수 있자나여!"
결국에는 맡은 일을 열심히 하다가 새로운 만남이 찾아오다니, 이거 너무 모범적이면서도 좋잖아 T~T
또 정비사 역할을 맡은 청년이 참 훈훈해서 검색했더니 사진 한 장 건지기가 이렇게 힘드냐 ㅠㅠ 모리오카 류우! 기억해두겠어!
그 외에도 여러 작품에서 보았던 키시베 잇도쿠라든가(<텐텐>에서 각인 ㅋ), <히어로>의 코히나타 후미요도 나오고, 왠지 반가운 얼굴들이! 타케나카 나오토는 언제 나왔었지? - _ -;; 시나리오가 잘 엮이고 조연들의 연기가 하나같이 괜찮아서 전혀 지루하지 않았는데!

마침내 비행기에 기계 고장이 생기고, 긴급 착륙을 시도하려는 그 때! 스위치를 눌렀더니!


...소리가 나가버렸다.

- _ -?; 뭥미?; 순간 관객들 전부 당황하고. 비행기는 추락하고 있는데 극장 안은 돌연 정적에 잠겨, 모두들 정신을 수습해야만 했다. 뭐야 이건? 잠깐 지지직거린 것도 아니고, 버벅댄 것도 아니고, 완전히 사운드가 나가버린 상태. 그것도 너무도 절묘하게 영화 속의 타이밍과 맞아떨어져서 원래 영화가 그런 거야? 하며 다들 벙 쪄 있었다.
수십 초 경과. 이거 안 되겠다. 옆자리 커플 여자분이 "압구정점 전화번호 나오나?"하면서 핸폰을 누르고 계시길래 잠시 길을 터주십사 하면서 "제가 나갔다 올게요"하고 벌떡 일어서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그렇다.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어서 나갔을 때 "상영에 문제가 있을 시 눌러주세요"란 버튼을 보아두었던 것이다 - _ -;; 보통 이런 일이 생겼을 때 일어나서 직원을 불러오는 일은 잘 없다. 내가 나가도 영화는 돌아가고 있는 데다가, 심지어는 긴박감 넘치는 클라이막스 장면인 데다가, 나가고 있는데 중간에 소리가 돌아오면 굉장히 쪽팔리고 허탈해지기 때문이다. 나가서 벨을 누르고 직원을 불러와 다시 들어올 때까지도 내 머릿속을 채운 1순위는 "환불 받아야겠다"가 아닌 "직원이 확인하기 전에 소리가 돌아와 있으면 안 되는데..."였다;;;

다행(인가:)히 직원이 동행해 들어온 순간까지 조용했던 극장이, 내가 들어온 순간 다시 파일럿들의 긴박한 대화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아직도 비행기는 추락의 위험 속에 있었다. 하지만 해결 직전의 클라이막스를 놓쳐버린 것은 분명했다. 옆자리의 덕후(추정)님이 중얼거렸다. "한국영화가 아니라서 다행이지, 자막이라도 계속 나오니!"
어휴, 뭐냐 이게. 시계를 확인했다. 이거 한 번 더 보기에는 너무 뒤쪽인데, 허리를 잘라먹은 채로 본다는 건 정말 아쉬운 일이다. 이렇게나 재밌는데. 게다가 자리에 돌아와보니 무릎 위에 있었던 핸드백과 카디건이 어디론가 사라져 있어서 어중띠고 좌불안석인 마음으로 마지막까지 지켜보게 되었다.

이 정도의 사고면 상영 후 직원이 와서 사과라도 하겠지, 싶었는데 사과도 없고 관객들도 다들 그냥 나가는 분위기. 어, 그런 거야? - _ -; 하고 일단 남아서 엔딩 크래딧을 전부 지켜보고 있는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옆자리 커플 여자분이 말을 건다.
"영화관에 자주 오시나 봐요?"
그제서야 처음으로 얼굴을 보았더니 연상(추정)의 여인으로 너무나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시며 말씀을 하셔서 적잖이 당황하며 대답했다. 일본영화를 좋아하나보다, 이 근처에서 일하냐, 보통은 그럴 때 나서서 알리지 않는데 대단하다는 요지의 말씀을 다이렉트로 하시는데, 아니 영화를 워낙 좋아하긴 하지만요 직장도 없고 이 근처도 아닌데 일부러 버스 타고 와서 영화 보는 백수라는 얘기는 굳이 밝히고 싶지 않구여;;; 심지어는 마이너 영화 취향이라 무비 꼴라쥬 지정관인 이 상영관의 구조에 빠삭해요;;란 말도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며 그보다는 옆에 남자분이 기다리시는데 어찌 제게 이토록 진지하게 말을 걸어주시나요?!;; 싶어 삐질삐질한 상황?;;
"실은 제가 영화 관련 일을 하거든요."
이라며 명함을 주시는데 무려 싸이더스 배급사......! 우와 멋지잖아 근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어 뻐끔뻐끔 이러고 있었더니 다시 두 눈 똑바로 "명함 있으면 한 장 주세요"라신다. 사실 명함 받으면 나도 내미는 게 당연한데 일부러 말씀 하시게 해서 죄송해요 ㅠㅠ 하지만 민망한 걸요! 이벤트 응모용으로 들고다니는 보험사 명함(대부분 보험 팔려는 줄 안다. 게다가 뒷면은 영업용처럼 "보험은 **생명이 좋습니다"라고 찍혀 있기까지 하다)에 "지금 회사를 다니고 있는 건 아니구여...!"라는 변명까지 덧붙여 뻘쭐뻘쭘 내밀었더니.
"다음에 좋은 영화 있으면 초대할게요(웃음)"
라신다. .....올레!
뭔가, "너 영화 되게 좋아하는 데다 극장 죽순이인 모양이구나"하고 인정받은 느낌? - _ -;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나와서 "저 항의할 건데 누구한테 하면 될까요? (방긋)"하며 알바를 붙들었더니 앞서서 항의하고 계신 분이 있다. "저희가 원인을 알아보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라며 훈련받은 미안한 표정으로 대처하는 매니저에게 "원인이 어쨌는지는 저희가 알 바 아니구요"라며 보상을 요구하는 저 모습은 소비자보호의 귀감...! (감동) 잠시 기다려달라는 말에 벤치에 앉아 있자니 여 둘 남 하나의 일행이 "얘네들이 스리슬쩍 넘어가려 한다"며 토론하고 계신다. 실제로 놀랍긴 하다, 그 상영관 내에서 우리 넷을 제외한 모두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냥 나간다는 것이. 이러니 극장 입장에서는 항의가 없는 이상 일단 가만히 있으려고 하고, 이렇게 한국 사회에서는 손해 보지 않으려면 따져야만 하는 문화가 되는 것 아닌가. 어쨌든 예매권 겟또...!

공짜표로 보러 와서 공짜표로 밥 먹고 또 공짜표를 얻은 데다가 어쩌면 또 공짜표가 생길지 모르는 이벤트가 발생하다니 이것은 참으로 훌륭한 백수의 하루...! 여기서 영화사 사람과의 인연이 이어져 그쪽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는 엔딩까지 맞이한다면 참으로 멋진 일이겠지만 그건 망상의 행복으로 족하도록 하고. 트러블도 재밌는 영화, 그런 영화를 본 하루였다. 

해피 플라이트
아야세 하루카,타나베 세이이치,토키토 사부로 / 야구치 시노부
어떤영화: ◆♤♣♡

(2009.07.23 / 압구정CGV)

by kisa | 2009/07/24 01:03 | I like | 트랙백(1) | 덧글(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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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영화....그리고... at 2009/09/08 11:08

제목 : 해피 플라이트 (A Happy Flight, 2008)
해피 플라이트 감독 야구치 시노부 (2008 / 일본) 출연 아야세 하루카, 타나베 세이이치, 토키토 사부로, 테라지마 시노부 상세보기 해피 플라이트..... 일본 영화 특유의 아기자기함이 있는 영화. 뭔가 감동을 주려는 영화라기보다는, 계몽적인??? 비행과...비행기...항공사에 대한...얼마나 힘들고..얼마나 열성적이고, 자기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등등... 항공사에서 홍보 목적으로 만들었다고 봐도 좋을 그런 영화. 주인공?? 이 영......more

Commented by minx at 2009/07/24 02:01
네 얘기가 더 영화같다고 생각했다.
(만두양처럼 나중에 만화나 영화로...)
야구치시노부 좋아하는데,
해피 플라이트 개봉한 줄 몰랐네. 必見!
Commented by kisa at 2009/07/24 22:12
minx> 나도 왠지 영화의 해프닝과 현실의 해프닝이 싱크로해서... ㅎㅎ
개인적으로 스윙걸즈보다 더 좋았음! 보셈!
Commented by mandoo at 2009/08/01 00:34
거..거기서 왜 내 이름이 나오나연.. 님 왜이러시나연.. 전 조용히 사는 평범녀1입니다..
Commented by kisa at 2009/08/01 00:45
mandoo> 조용히 사는 평범녀1이 다 죽어도 넌 그 역을 맡지 못한단다. ㅋ
Commented by nacre at 2009/07/24 08:12
푸핫핫핫
징짜 웃긴다
싸이더스 배급사 왠지 너 일하면 완전 해피 직장일것 같은뎅
Commented by kisa at 2009/07/24 22:12
nacre> 흠 일단 영화를 본다는 것만으로 해피해피하겠지? ㅠㅠ
일자리는 둘째 치고 서포터즈라도 시켜주면 좋겠다...
Commented by wbin at 2009/07/24 08:31
ㅠㅠ 보고 싶었는데, 결국 6시 40분 퇴근 (....)
진짜 엮여서 싸이더스 들어가면 재밌겠는데? ㅋㅋ
Commented by kisa at 2009/07/24 22:12
wbin> 평일엔 안 된다니까 ㅎㅎ
Commented by daamn at 2009/07/24 18:33
저는 인천CGV에서 이 영화를 보았는데
초반에 모의 비행을 하고나서 지상직 직원들 회의 장면이 나올무렵
영화가 딱 끊기고 불이 켜지더니 음악이 흘러나오는 -.-.....
별말 없이 한 오분정도 있다가 광고부터 다시 틀어주더라구요;
Commented by kisa at 2009/07/24 22:13
daamn> 그러고 나서 아무런 조치도 없었나요?; 정말 강짜로군요;;;
Commented by nomade at 2009/07/27 09:20
ㅎㅎㅎ 여튼 남아서 획득하다니.. 짝짝짝
Commented by kisa at 2009/07/27 13:29
nomade> 짝짝짝~ 또 영화 보러 갑시다!! >ㅁ<
Commented by mandoo at 2009/08/01 00:34
큭큭큭 재미있구만..ㅋㅋㅋㅋ 역시 인생은.. 새옹지마.ㄲㄲㄲㄲ
좋은 인연으로 발전하길..학학..공짜영화이길 특히 바람<-ㅋㅋㅋㅋㅋ
Commented by kisa at 2009/08/01 00:45
mandoo> 흠 왠지 며칠 지나고 보니까 공짜 영화라도 과연 올지 안 올지 ㅠㅠ 왔으면 어서 ㅠㅠㅠㅠ
Commented at 2009/08/01 00:36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mandoo at 2009/08/01 00:36
내...내가 썼는데 내가 못봐!!머 이렁미..ㅋㅋ
Commented by kisa at 2009/08/01 00:46
mandoo> 고맙당! >ㅁ< 신기하네 모두들 텔레파시로 읽었나 ㅋㅋㅋ
Commented by m*nt at 2009/08/02 22:24
타케나카아즈씨는 마지막 엔딩크레딧올라가며 후일담나올때
지상근무 토모코언니를 따라 졸랭 뛰다가 발꼬여 넘어지시려는 그분.
나도 그순간 언뜻보고 푸하_ 하며 정말 그분 맞는겨? 했음 ㅋㅋㅋ
Commented by kisa at 2009/08/03 11:50
m*nt> ㅋㅋ 그때 옆자리 누님과 수다 떨고 있었나 - _ -;; 힝 ㅠ
Commented by m*nt at 2009/08/02 23:23
류- 귀여웠지 *-_-* 엉니가 좋은거... ㅋ
http://www.youtube.com/watch?v=Kayn4bhyubA
http://www.youtube.com/watch?v=SZAy3PM1LL4

꺄르륵 :-D
Commented by kisa at 2009/08/03 11:51
m*nt> 류 귀여워어어어!!
나츠이치는 혹시 여름에 한 권씩 책 읽는 캠페인인 거야? ㅋ
69 집어들 때 옆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표지는 하구미 그림이고
촬영중인 건 하구미 역할이네 ㅋㅋㅋ
영화라면 좋겠지만..........
Commented by kisa at 2009/08/03 11:52
괜찮은 사진 한 장 건지려고 구글을 몇십 페이지 넘겨봐도 증명사진밖에 안 나오드만...
이렇게 조회수 적은 유투브 영상을 건지는 언니님은 그야말로 웹써핑의 다크 로드 - _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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