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5월 19일
[일기] 알바 시작

알바는 작년에 하던 관광용 단문 한영 번역 알바. 한 줄에 100원꼴로 일명 인형눈알붙이기 알바라고도 부른다. 속도가 얼마나 붙느냐에 따라 시급이 달라지는 셈이다. 경기가 안 좋아서 예산이 깎였다고, 월급도 삐-십만원이나 깎고! 문장 내용은 길어지고!(한 줄에 네 문장이 웬말이냐!) 하루에 최소 4-5시간씩 달라붙어서 쉬지 않고 해야 하니, 다음 날로 미루면 수복이 안 된다. 나름 알바를 시작하길 애타게 기다렸는데, 작년에 하던 게 있어서 그런지 쉬운 게 아니라 그 지리함에 벌써부터 한숨만 푹푹 나오고, 굳은 자세 때문에 온몸이 쑤신다. 카페에 앉아서 하면 등도 아프고 양반다리 하기도 힘들고 무릎도 시리고... =ㅅ=; 되도록이면 쉬는 시간을 섞어가며 집과 밖, 장소를 옮겨가며 하고 있다.
어제 갑자기 면접 제의가 들어왔다. 앗싸! ......라고 하기에도 골때리는 것이, 왜 이상형의 회사가 나타났을 때 다른 회사에서 제의를 하는 것일까. 만일 그 날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이 회사의 연락에 방방 뛰며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몰랐을 텐데. 취직에 관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타이밍의 미스매치의 연속이다. 지난 번에 중복으로 컨텍이 되어서 1시간의 타이밍 문제로 자리가 날아가버린 일도 있고. 여하간 뭔가 "세상엔 이런 일 투성이다"라는 걸 극명하게 보여주고 절절하게 깨닫게 하여 사람을 한없이 작아지게 하는 것이 취업인 듯.
대체 이 회사에 언제 지원했던 거지? 하고 확인해보니 한 달 전의 일이었다. 조금 거만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가, 생각해보니 내가 그 홈페이지에 가서 직접 지원을 한 거라서 이내 자세를 고쳐먹고 "이 회사를 선택한 이유" 같은 입에 발린 소리를 지어내기 시작했다. 실은 선택하고 말고 할 게 어디 있겠나. 보통은 써주면 고맙거나, 가주는 걸 고맙게 여기라고 하거나 둘 중 하나겠지. 지금 나는 절실하게 전자의 상황이고. 면접 소식을 부모님께 알림으로서 방바닥을 긁고 있던 나의 주가를 조금 상승시킨 후(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1년 전의 계약은 어쩐지 부모님으로부터 잊혀지고 나는 취직도 못 하고 시집도 못 가는 천하의 불쌍한 딸이 되어 동정과 보살핌을 동시에 받고 있다) 간신히 면접에 어울릴 만한 여름 복장을 갖추어 입고 나섰다.
한참 일찍 가서 알바 한 시간 해야지-라고 해놓고는 서둘렀는데도 30분 전에 도착, 서울역 Book off를 처음으로 구경하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로비에 들어갔다. 밖에서 만날 때는 10분 전이 예의인지 몰라도, 누구를 방문할 때는 정각이 좋다. 로비는 환하고, 2층까지 높힌 천장에, 옆에는 커피빈이 붙어 있고, 중앙에는 무려 그랜드 피아노가 나와 있었다! 아니 이건 웬 취미.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어떤 잘 생기고 몸매도 좋으신 남자분이 슬금 다가오더니, 피아노 앞에 앉더니, 연주를 시작하는 것이다! 아니 이건 나으 긴장을 풀어주려는 우연의 선물? 그것도 꽤나 아름다운 선율에, 적잖이 감동하여 웃음짓고 있는데, 몇 초 안 가서 다다닥 도망가버리시네 =ㅅ=;; 우와, 이건 학관에 놓여 있던 피아노 치는 거랑 차원이 다른 담대함인데. 그것도 완주하는 것보다 치다가 그만두는 게 더더욱;; 시간도 다 되었고 해서 따라서 엘리베이터를 탔더니, 아아, 보험회사 연수실쪽에 내리는 그 분(...) 여러분, 잘 생긴 신랑감을 구하려면 보험설계사를 노리는 게 확률이 좀 크다고 봐요. 그 분들이 괜히 영업맨으로 돈 버는 게 아니거든 - _ -;; 아니 근데 이 건물 왜 이렇게 보험회사가 수두룩하게 입주해 있는 거야?;;; 왠지 적진에 들어선 느낌;;
5분 전 땡- 할 때 전화해서 사무실로 들어갔다. 멋진 곳. 소파에서 기다리라는데, 거기 앉아 있는 두 분 여성의 풍모는 아무래도... "저 혹시... 면접 보러 오셨나요?" 그렇다며 시간 확인까지 하는 상대들. 이럴 수가. 경력직 면접인데, 단체로 하는 거야?;; 이건 무슨 사태?;; 면접실에 들어서고 보니, 4명의 여자가 한 편에 주르륵 앉아서 순서대로 자기소개 하는 정황?;; 나 이런 건 대졸 때도 거의 안 겪어봤다고!! (<-서류전형에서 족족 떨어져 면접이라곤 세 군데밖에 못 본 인간) 다행히 반대편부터 시작해서 그 사이 조금 생각한 뒤에 대답은 할 수 있었는데, 역시 주눅이 들고 말았다. 상무님이라시는 여자분은 꽤 상대의 말에 호응을 하는 타입이셨는데, 여자 팀장님은 눈을 내리깔며 이력서와 얼굴을 쳐다보는 폼이 아주, 아주, 서늘했달까. 아아, 압박면접은 우리(...) 회사에서는 권장하지 않지 말입니다. 뭐 그래서 취뽀에서 "그렇게 활짝 웃어주면서 희망을 품어주고는 탈락시키다니!"라는 원한의 글도 읽어보긴 했지만.
일반적인 질문과, 위트를 알아보려는 질문. 너무 긴장해버렸어. 다들 외국계 회사 다니구. 근데 직무 설명 들으니까 내 범위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팀장님 짱 무섭구 ㅠㅠ 잘 하지도, 망치지도 않은 면접. 아아, 내일 그 회사 어떻게 되는 거냐고 헤드헌터한테 전화나 걸어봐야지 - _ -;;
면접이 끝나고 나오면서 회현에 있는 뱀경양에게 전화를 걸어봤더니, 어쩐 일로 지금 바로 코앞에 서울역에 있단다! 친구랑 있어서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우와 우연.
근데 통화중에 누가 붙잡아서 뒤돌아보니 회사 입사하고 맨 처음 옆자리에 앉았던 선배님이 아닌가! 공채 출신으로는 최초로 사내 결혼을 하고는 이직해서 방금 그 건물의 숱한 보험회사 중 하나에 다니고 계셨던... 곧 애기 아빠가 되신단다, 축하축하.
마침 생각이 나서 숙대입구역에 있는 그 애기 가진 회사 후배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연락이 안 돼서, 같은 건물에 있을 다른 후배(다들 같은 학번이라 친구다)에게 전화를 걸어 잠깐 보기로 했다. 숙대입구 카페에 갈까? 싶었던 것이다. 잠깐 사이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쏟아내듯 풀어내고, 우리 다음에는 분발해서 회사 얘기 말고 개인 신상에 일어난 즐거운 얘기 좀 해보자고 다짐했다. 배웅하는데 마주친 신입사원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해주어서 좀 미안했다. 상대가 나를 기억한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고.
같은 사무실에 있는 동기 오빠(여행을 나보다 좋아한다. 뒷구멍으로 사업중이다)한테 저번에 파토난 장어구이 저녁을 사달라고 연락했으나,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벌써 5번째 바뀐 전화번호로 연결되더니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음만 나와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2188이라는 국번 외에 떠오르는 사무실 전화번호가 하나도 없다.
며칠 간 쑤셨는 데다가 오전에 격한 운동, 오랜만의 정장에 구두 차림이 피곤해서 도저히 숙대입구까지 오르막을 걸어갈 엄두가 안 났다. 원래도 지하철을 싫어하지만, 사당에서 갈아타는 애매함은 더 싫고, 무겁게 지고 나온 노트북을 어떻게든 써줘야겠다는 생각에 버스 정류장에 섰다. 이것저것 버스가 있다. 그래, 제일 먼저 오는 걸 아무 거나 잡아 타자.
7016번은 서울역, 시청을 지나 광화문, 경복궁, 효자동까지 가는 라인이었다. 반대쪽으로는 홍대에 가다니, 몇 번 타본 적은 있었지만 생각보다 황금라인이었군! 일층카페에 갈까 싶었지만 배가 고파와서 결국 밥도 먹고 퍼져 앉을 수도 있는 종로 오봉뺑으로. 주문을 하는 찰나, 회사 친구(후배지만 3살 오빠이므로 친구 먹음)한테 뜬금없이 "잘 사나?"하고 문자가 왔다. 오늘은 회사 홈커밍데이라도 되는 것이란 말인가 ㅋㅋ 반가워서 통화를 눌렀더니 "너도 늙어서 문자 치는 거 귀찮지?"하고 구박 받았다. 보통은 반대인데. 언제나 그렇듯이 똑같은 시덥잖은 소리만 하다가(노니까 좋냐, 게임 좀 그만 해라, 밥은 언제 사줄 거냐) 몇 분 후 버스 탄다며 끊는다.
오봉뺑은 꽤나 한가했지만 몸이 너무 쑤셔서 집에서 나머지를 하기로 하고 패퇴했다. 이런, 맹렬히 하다가 일기 잽싸게 쓰고 나머지 1시간 하려고 했더니 벌써 12시잖아 oTL 그래도 뭔가, 이렇게 늘어놓으니 간만에 진짜 일기다운 느낌이 들어서 뿌듯.
시간이, 저걸 미룰까 말까 고민하게 하는구나. 교수님의 장인상으로 수업이 취소되고 더불어 숙제도 취소될지 모른다는 부푼 꿈을 안고, 그 시간에 할 걸로 미루고 침대에 드러누워버릴까. 일이 없어도 고민, 있어도 고민. 그런 일상의 시작.
# by | 2009/05/19 23:58 | I am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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