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기술] 생각하게 되는 것들

"약지가 검지보다 얼마나 길어?" 친구가 갑자기 물어보았다. EBS에서 본 다큐에서 이르길, 태내에서 XY염색체에 의해 다르게 분비되는 테스토스테론과 에스트로겐의 비율에 따라 여성과 남성의 근골격, 뇌구조, 그리고 약지와 검지의 길이가 다르게 형성된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남녀의 차이, 남자는 수학을 잘하고 여자는 언어를 잘해, 남자는 멀티태스킹을 잘 못하고 여자는 공감능력이 뛰어나다든가 하는 게 육체 면에서 근거가 있다는 얘기다. 게다가 눈의 구조에도 차이가 있어서, 여자아이는 색채에 민감에 핑크나 빨강 같은 화려한 색에 반응하고 남자아이는 그보다는 달리는 기차 같은 동적인 움직임에 더 쉽게 반응한다고 한다.

일리가 있는 얘기다. 1학기 때 김미라 교수님의 수업을 들으며 생체반응적인 부분이 얼마나 사람의 심리와 행동방식에 영향을 끼치게 되는지 알고 더 흥미를 갖게 되었다. 호르몬과 수용체의 다발적인 연쇄반응에 의해 움직이는 인체는 정말 신비롭다. 거기에서 기인하는 다양한 기질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하는 사람이 있고, 그냥 인상으로만 파악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체취로 판단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것도 뒤떨어지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고 그저 다를 뿐이다. 쉽게 지탄하거나 곤혹스러워 하는 버릇, 성격 같은 것들이 실제로는 다 무시할 수 없는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면, 모두 납득할 만한 것이 된다.

예전엔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하나씩 배워가는 사실들이 그 자체로 정해져 있는 단계라고 생각했고, 누군가가 다른 사실을 얘기하면 그것은 "아직 이 단계에 이르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러저러한 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주장을 거리낌없이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타고나는 신체만큼이나 노출되는 환경에 의해 크게 영향받는 것이고, 그렇기에 늘 가까이서 생활하는 이들과는 비슷하게 통하거나, 통하지 않더라도 한 가지의 "다름"만을 인식할 수가 있었다. 중학교 때보다는 고등학교 때가, 고등학교 때보다는 대학교 때가 더 '특이한' 친구들이 많다고 느꼈지만, 그 특이함도 남들이 보기에는 한 가지로 치부되는 명도였을 뿐이다. 결국은 매한가지로 흑백을 논하고, 회색을 대단한 것인 양 이야기하는 좁은 세계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컬러다. 나는 늘 "틀린 게 아니라 다르다는 것을 몰라준다"며 세상에 투정을 부렸지만, 정말이지 나도 모르긴 너무나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계속해서 깨닫는다. 사람을 구성하는 것은 유전자부터 시작하여 모든 역사와 환경까지 포함되며 입장이란 것도 너무나도 중요하다. 나에게 익숙한 것이 누군가에겐 익숙하지 않다. 모두 같다 하여도 전부 다를 수 있다. 시간이라는 자원을 얻은 후 나는 내 돌다리 두들기는 정신이 허용하는 선 안에서는 최대한 많은 것을 접해보려 노력했고, 1년 만에 지금까지 살아오며 만났던 인물들을 다 합한 것보다 더 넓은 범위의 다양성을 맞닥뜨렸다고 생각한다. 이는 절대적인 수치의 문제가 아니라, 내 관찰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무언가를 바라볼 때, 금방 분류 안에 집어넣기보다는 그 표면과 밑바닥을 한 번 헤집어보는 새로운 습관. 어떻게 보면, 이 경험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가치 있는 1년을 보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다름"과 그 이유들을 알기 시작한 것이 그다지도 중요한 의미가 되는 것은, 결국에는 다시 "경험"과 "입장"과 "환경에의 노출"의 중요성으로 귀결된다. 대부분 사람은 경험하지 않아도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리경험으로서 책과 미디어의 다양한 매체가 추천되기도 한다. 하지만 대리경험이나 가정은 다르다. 실제로 그 상황에 처해서 그 입장이 되어 느껴보고 생각해봐야만 진짜로 안다고 말할 수 있다. 굳이 불 속에 손을 집어넣지 않아도 불이 뜨겁다는 것을 배울 수는 있겠지만, 뜨거웠던 적이 없었다면 뜨거운 것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고, 가족을 잃어보지 않았다면 그 상실감의 깊이나 혼란스러움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호수 위에 섰을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뭔지 상상을 하고 기대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 것이 되기 전까지는 어떤 것이 '나의' 사실인지 알 수 없다.

가만히 앉아서도 세상 일을 다 아는 현자가 되어보지 못한 나는, 그 입장을 이해하거나 그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결국 사람을 성숙시키는 것은 경험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제도교육을 벗어나면 실제 나이보다는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이를 따진다. 동일한 환경에서 변화 없이 지낸 사람보다는, 다른 경험들을 같은 생각으로 반복한 사람보다는, 진짜 여러 환경에 처하게 되고 거기서 실감을 하고 판단을 하고 행동을 해 본 사람이 그만큼 더 성숙하다. 인생이 결국 사람을 대하고 행동을 취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계속 시뮬레이션만 하고 '그러려니' 생각했던 사람보다는 긴장과 스트레스 속에서 실제 결단을 내려본 사람이 노련해진다. 아이를 보호하겠답시고 애지중지 온실 속에서 키우면, 그건 말려죽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인간은 노출되는 환경에 동화되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한 가지에 너무 익숙해지고 거기에 맞춰 굳어져 가면 결국 다양한 세상을 대하는 유연성을 잃는다. 판단력과 기지와 응용력, 창의성을 잃는다. 그러기에 무엇보다도 새로운 것을 대하는 경험은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소한 사건이라도 재밌다고 생각하고 있다. 요즘 '고생 좀 사서 해야 할' 애들이 많다고 느낀다. 끝까지 유지할 자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상관 없겠지만, 가능하면 서 있는 장소를 바꿔가며 스스로를 훈련시킬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무언가에 익숙해지고 능숙해지는 것이 기뻤던 옛날과 달라진 지금이 더 기쁘다. 무언가 한 가지라도, 정말 조잡하고 앞으로 단 한 번도 써먹을 일 없을 그런 작은 발상이라도 스쳐지나갔다는 사실 자체를 소중하게 여긴다. 그런 모래알들이 울퉁불퉁 쌓이며 이루는 지층이, 그 위에 쌓일 지층의 기반이 되어줄 테니까. 돌다리를 두드리는 걸 넘어서서 시멘트 담에 철창까지 쳐 가며 이동하는 데다가, 게으름에 금방 싫증내고 뭔가를 지속적으로 하는 데 젬병인 천성으로는 무언가 커다란 걸 이룬다거나 할 일은 없겠지만, 그냥 그런 소소한 것들을 끄적거려 가면서 어제와는 다른 오늘을 이따금씩 느껴보는 것만으로, 내일을 살아갈 가치를 얻는 데는 무리가 없지 않나 싶다. 어쨌거나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만족이 제일인 법이다.

by kisa | 2009/05/05 22:39 | I reckon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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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지그 at 2009/05/06 00:31
동의합니다~
^^ 안녕하세요?
Commented by kisa at 2009/05/07 00:16
지그> 우와우와, 첨엔 닉만 같은 다른 분인가? 했어요!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어요 지그님 > _ <;;
루즈한 하루하루를 살면서도 반복적으로 드는 생각들이 조금씩 쌓여가는데, 그걸 정리는 못하고 이렇게 풀어만 놓지요.
같은 면을 보셨다니 더 반갑습니다 :)
Commented by Lon at 2009/05/07 00:13
처음 부터 끝까지 자기 만족이 제일인데.. 그게 안 되네.
이 나이 먹었으면 스스로 자존감을 끌어올려야 하는데, 그게 안돼.
헤헤, 그래도 노력해야지. 보고 싶다. ;ㅁ;
Commented by kisa at 2009/05/07 00:18
달자> 자기를 괴롭히면서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방법도 있지만, 난 그 수법은 자주 써먹지 않아 ㅋ
나이랑은 별도로, 생존전력의 차이겠지 뭐.
가끔은 이런 생각을 못 할 정도로 좌절하고 혼란스럽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추스리고는 스스로 잘했다 그러고 마는 방어 체제 =)
Commented by minx at 2009/05/08 09:24
풍부한 경험이 다채로운 인생을 만든다는 평소 나의 대원칙에 의거 공감 1표.
무언가 커다란걸 이루고싶지 않지만, 매일 새롭고 싶은건 요즘사는 누구나 다 마찬가지일 듯.
자기만족의 최면을 걸어보자꾸나~(※자뻑주의)
Commented by kisa at 2009/05/08 15:21
minx> 매일 새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훈늉한 일이라 믿소~ (<-이미 자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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