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사막으로] 콜로니아의 휴일

마지막 체류지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이른 아침 도착해서 남미사랑에 다다르기까지는 아주 순탄했다. 덜깬 느낌, 나른한 분위기에 너른 마당을 바라보았다. 전날 도시의 더위를 가시게 한 비처럼 촉촉한 대화의 울림. 맛난 쌀과 가지고기볶음, 김치찌개가 푸짐한 아침상. 그리고 나는 나른해져서 약을 먹고 잠을 청했다. 몇 날 연속되었던 야간버스의 피로와 잦은 더위와 추위의 변화에 결국에는 뒷덜미를 잡혔나보다.


주변의 소음에도 상관없이 뻗어 자고난 뒤에는 사람보다 소가 더 많다는 아르헨티나에 온 기념으로 한밤중에 스테이크 파티. 또다시 만난 29살 여자와 25살 남자들의 조합에, 학교 후배들이었다. 지금까지 어느 학교를 나왔다는 얘기를 할 일은 전혀 없었는데, 한국사회의 문제라고 욕하긴 해도 후배를 만나니 반갑더라.


하루를 휴식으로 공친 대가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일정은 예정만큼 느긋한 것이 되기는 글러버렸다. 다음 날은 제일 먼저 떠나는 차표를 구입하고 온종일 시내를 돌아다녔다. 에비타가 연설했던 분홍빛 발코니에서 Don't cry for me Argentina를 조용히 흥얼거려 보기도 하면서.


오늘은 우루과이, 콜로니아 데 세크레멘테라는 작은 도시에서의 하루.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배로 3시간(빠른 배는 1시간) 거리, 뱃삯은 만만치 않다.(궁상은 내 도착 전날 남은 게 그것밖에 없었다며 자기와 자기의 새 동행의 표 두 장을 사왔다. 25000원을 더 주고라도 비싼 표를 사서 같이 가면 좋을 텐데-하고 새 동행은 말했지만 난 약기운에 정신이 없다며 결정을 미루고 그 다음 날의 남아 있는 비싼 표를 끊었다. 여러모로 속편한 방법이다)

이곳은 트렉킹을 같이 한 보혜 부부의 추천으로 오게 되었다. 특별히 구경할 게 많지는 않지만 크루즈를 타는 것도 괜찮고 배 안에서 공연도 하고, 마을은 한적하고 예쁜 분위기라고. "타이타닉을 기대해도 돼? *_*"라는 나의 말에 보혜는 당황했지만, 배 안에 엘리베이터와 면세점, 오락실이 있는 거대 배는 괜찮게 두근두근했다. 자리를 잡아 해리포터를 귀에 꽂고 자고 있는데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보혜 때는 특별히 탱고쇼가 있었다는데 이번엔 그냥 호쾌한 목소리의 남자 가수 맨몸이라 잠깐 쳐다보다 자리로 돌아왔다. 그래도 곡들은 꽤 좋아서 이어폰은 내려놓은 채로 다시 눈을 감았다.


기대를 많이 하면 실망하는 게 사실이지만 이미 실망할 게 정해져 있는 상태로는 또 다시 업 되는 것도 금방인가 보다. 마을 전체가 시에스타에 빠진 듯한 조용한 분위기. 파스텔 톤으로 예쁜 집들과 길거리를 질러다니는 스쿠터들. 길 전체를 녹음으로 물들이는 나이 많은 가로수.


2시간이면 다 볼 수 있다고 들은 것과는 달리,
5시간도 모자랄 것처럼 동네를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오래된 극장의 뒷쪽. 들어가도 되냐고 물으니 '어서 오세요'란 느낌으로 손을 펴보이는 아저씨.
요 벤치에 앉아서 슈퍼에서 사온 엠빠나다와 사이다로 점심을.

황해도 이 정도 빛깔은 아니지...?
아르헨티아와 우루과이 사이의 바다.
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 남자는 불가리아 출신으로 남아공에서 영어를 배웠다고 한다.
크루즈 위에서 서성이는 나를 보고는 벤치의 자기 옆자리에 앉으라고 말을 걸까말까 하다가
걸자-하는 순간에 내가 떠났다고 하던가.
자기는 우루과이 수도 몬테비데오까지 갔다가 내일 돌아가지만
부에노스 아이레스서 만날 수 없겠냐고 해서 둘러둘러 거절했더니 이내 인사하고 헤어졌다.
사람을 만나자마자 자기 전 여자친구는 양다리를 심하게 걸쳤다는 역사를 줄줄 읊는 남자따위.

1등석은 배의 가장 위에 에어컨 완비된 발코니에 앉을 수 있다.
자리가 좋은 것 외엔 암것도 없다고 들어서 실망했던 것과는 달리 음료수와 파이를 주어서 아구아구.

예정된 시간보다 훨씬 늦게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
공기가 후끈한 24시간 피자집에서 1000원짜리 1/4 피자를 시켜서 맛있다고 먹고 있는데
옆자리 앉은 아저씨가 자기가 반쯤 마셨던 콜라 600ml를 주고 가신다.
* _ * "그라시아쓰!"
(아용 나 또 얻어먹었어 되게 불쌍해보였나봐!! ^_ㅜ)

by kisa | 2009/02/14 23:55 | I remember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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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nomade at 2009/02/16 20:32
오기 싫겠네...... 마무리... 화이팅!
Commented by kisa at 2009/02/21 05:00
nomade> 너무 뒤늦게 그 감정을 깨달아버렸어... ㅜㅜ
Commented at 2009/02/17 13:3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kisa at 2009/02/21 05:02
L> 막판에 크고 작은 건이 죄다 터지고 있음... - _ -;
네가 사다준 모기약을 한 달 내내 뚜껑도 안 열다가 최근 5일간 반은 넘게 쓴 듯;;
Commented at 2009/02/18 10:0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kisa at 2009/02/21 05:04
N> 왠지 안 봐도 그랬을 것 같은데 뭘 ㅎㅎㅎ 대단해 > _ < 굉장해!
곧 얼굴 보여줘 > 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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