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사막으로] 산, 그 이상의 것 ~토레스 델 파이네

이번 여행의 가장 높은 벽.
토레스 델 파이네.
(가장 높진 않다. 이미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도와 세상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호수를 다녀왔으니.)
생각을 많이 하면 기대와 함께 걱정과 불안도 커지는 법이므로 이곳은 남미대륙 남쪽의 반환점으로 눈 딱 감고 정해버렸다.
무조건 하는 것이다. 겨울방학(이곳의 여름이자 우기) 때 와야 하는 두 가지 이유-우유니와 토레스-를 성사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이미 그 중 하나는 좌절되었으므로 나머지 하나라도-과, 그 큰 벽을 넘었을 때의 성취감과 해방감을 위해서.
-해방되길 위해 속박당한다니 인간은 얼마나 우스운 동물인가. 하지만 가끔은 그런 식의 합리화와 해석에 기대어야만 힘을 내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체화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꽤나 오랫동안 3박4일짜리 트렉킹을 2박3일로 줄여보려고 발버둥치지 않았단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토레스 델 파이네의 베이스캠프인 칠레 푸에르토 나탈레스에 도착하자 그런 생각은 어느 샌가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 W코스의 완주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립공원으로 들어가는 버스에서 만난 현&뽀 부부, 그리고 클래식 기타를 메고 다니는 조용한 의대생 맹군이 우리와 함께.
토레스는 생각만큼 기온이 낮거나 하진 않았지만 바람만큼은 명성대로 자칫하면 떠밀려 죽을 만큼(!) 강했다.
생각해보면 텐트에서 자는 건 처음이 아닌가?
여러 옵션 중에서 우린 돈을 좀 투자해서 산 내의 유료캠프장에 비치된 텐트, 매트, 침낭을 빌리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각자의 텐트를 짊어지고 더 먼 무료캠프장(오로지 흙바닥과 화장실밖에 없는)까지 오르는 방안을 택한다.
다수는 후회하고, 다수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나는 나의 선택에 매우 만족했다.
나의 배낭은 츄리닝 바지, 슬리퍼, 세면 도구, 그리고 4일간의 식료품으로 가득 차 있다.
(버너와 코펠은 없다. 무조건 빵이다. 빵을 씹고 나아가는 거다.)
캠핑에서 무척 유용했던 건 역시 손전등, 그리고 따로 들고간 350g 오리털 침낭.
(두 겹으로 잤다/ 저 보라색 오리털 잠바 속에 침낭이 감춰져 있음)
빨간 손수건은 차가운 냇물에 적셔서 머리를 싸매어 열을 막았고
하늘색 스카프는 추위를 막는 모자 겸 고행으로 흘러내리게 된 바지를 졸라매는 데 쓰였으며
국립공원의 나뭇가지 하나는 훌륭한 지팡이 역할을 했다.
짐을 지거나 지지 않은 채, 하루에 걸은 거리는 약 20km.
바람은 물론이거니와 시시각각으로 변하기로 유명한 토레스 델 파이네의 날씨는
나흘 간 정말 환상적으로 좋았다.
첫날은 흐리고 바람이 많이 불어 체온이 왔다갔다 해서 머리가 아파 괴로웠다.
길 자체도 별로 한국 산과 다를 바도 없고 4시간쯤 걸려 보게 된 빙하는 그냥 조금 신기한 색깔일 뿐.
첫날 지친 모두는 둘째날은 거리를 줄여 느긋하게 즐기는 편을 택했고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는 셋째날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지칠 줄을 몰랐다.
넷째날 새벽 3시, 동그란 손전등 불에 의지해 네 명이 앞사람의 발자국 하나만을 보며
바위타기를 하며 올라간 토레스의 일출은 그 아름다움보다 그 행복으로 잊지 못할 것이다. 
현&뽀 커플 덕분에 더욱 즐거웠고(꼭 그들이 먹을 걸 많이 나눠줘서라기보다는)
마지막을  향해 갈수록 의욕이 솟아났던 토레스 델 파이네 W 코스.
2009.02.02 완주.

by kisa | 2009/02/04 23:38 | I remember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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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달그림자 at 2009/02/05 09:44
고생했어. 난 요새 고소공포증이 더 심해져서.. 이제 산은 가벼운 산이라도 엄두를 못내겠더라. ;ㅁ;
Commented by kisa at 2009/02/10 02:13
오오 고소공포증이... 어떡하면 더 안 심해질까낭? ;ㅁ;
근데 우리나라 산은 뭐 등산할 때 아래 내려다볼 일이 별로 없다는... ㅋㅋ
Commented by 사은 at 2009/02/05 21:17
먼 곳 바라보는 언니 사진이 너무 멋있어요. 뭔가 여행한 시간이 옷처럼 어깨에 둘러있으신 거 같은.
Commented by kisa at 2009/02/10 02:16
사은> 역시 꿈보다 해몽인데 해몽도 풍월 읊는 사람이 잘 한다고
꾀죄죄함을 가리기 위한 뒷모습 사진이 이리 우아하게 번역되는...히힛
산을 오른다는 건 늘 뭔가 가슴 벅찬 느낌이 되는 것 같은.
(숨이 차기도 하지만;;)
Commented at 2009/02/08 10:15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kisa at 2009/02/10 02:16
n> 마지막 줄 보고 호스텔에서 미친 듯이 뿜었다는 거 아냐 ㅋㅋ
지금쯤???
이제는?///
Commented by mandoo at 2009/02/11 12:06
이모님은 텐트를 들고 다니셔서 무료 텐트장에서 묵으셨다는 말씀만 해줘서
유료 텐트장이 있는 지 처음 알았다;ㅎㅎ
뭔가 까무잡잡해졌구나!! 여행간 티를 내줘야 하죠!?흐흐흐

사진이 뻥..하고 막힌 가슴 뚫어줄 것만 같다.
넌 그랬니? 뿌듯했을 듯.
Commented by kisa at 2009/02/21 05:12
mandoo> 이모님 좀 짱이신 듯 ㅎㅎㅎ
가슴이 순수한 공기로 가득 들어차는 느낌이었단다 >_ <

내 양손등을 볼 때마다 한숨만 폭폭 나온다. 뭐 비법 없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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