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사막으로] 쿠스코, 쿠스코

여행의 백미는, 혹은 여행자의 감성을 가장 울리게 되는 것은 결국 사람, 그리고 음식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루 몇 번씩 맞닥뜨리게 되면서도 그 중 극소수만이 가장 깊은 곳까지 자극할 수 있다.
오늘 아침도 누구씨가 늑장을 부려 12시도 안 되어 배가 많이 고팠지만, 결국 나중에 가려던 박물관 앞을 지나치게 되어 휙 둘러본 후에야 식당을 골랐다. 이왕이면 페루비안 음식, 치차론, 아도보 같은 걸 먹고 싶었지만 가볍게 묵살당한 후, '그럼 넌 대체 아무거나, 가다보면, 이라면서 유독 내 의견만을 무시하는 이유가 뭐냐'라는 울분을 속으로 가라앉히고 "뭐 니 좋아하는 햄버거라도 먹을 테냐" 하다가 두 번째로 스쳐지났던 일식집 앞에 섰다. 일식+채식, 킨타로.
 단아하게 꾸며진 복층 내부. 빵+고기+야채가 아니면서 든든하게 속을 채울 수 있는 돈부리 메뉴가 땡겨서 안으로 들어갔다. 일본인치고는 오똑한 이목구비를 지닌 예쁜 여주인이 "곤니치와-"하고 인사하자 나도 화답했다. 우여곡절 끝에 시키게 된 오야코동과 가키아게동은 오늘의 메뉴로 녹차, 쯔케모노, 미소시루와 아이스크림이 딸려나오는 것이었다. 처음 먹는 거라 먹는 방법을 물어봐야 했던 가키아게동은 익숙한 야채와 바삭한 튀김이 만족스러웠으며, 미소와 키나코로 버무린 듯한 콩줄기 반찬은 너무나 고소하고 입맛에 딱이었다. 그리고 한참 뒤 나온 오야코동! 아주 절묘한 정도로 익힌 계란과 간이 딱 맞는 닭고기. 한 입 입에 넣는 순간, "아아, 극락이야!" 하고 눈앞에 한 줄기 섬광이 번쩍이는 듯. 여태 먹어본 오야코동 중에서도 최고였다. 팥앙금을 듬뿍 곁들인 바닐라 아이스크림까지 먹어 치운 후 여주인께 찬사의 말을 건네며 사진도 함께 찍었다. "쿠스코데 이치방 시아와세나 지캉데시타!(쿠스코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이후 내 기분지수는 완전 극상에서 맴돌아 이후 본 현대미술관도 만족스러웠고, 감질맛나게만 하던 6천원짜리 마사지도 참아줄 수 있었다.

자, 드디어 흩어질 시간이다. 같은 걸 보면서 감흥을 나눌 수 있는 여행 동무가 있는 건 즐거운 일이지만, 두 인간이 2주간 쉼없이 같은 공간에 있으면 공기가 거칠어지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가끔은 환기가 필요하다. 마음의 여유를 충전할 수 있는.
 우선 안 챙겨온 것, 챙겨왔으나 잃어버린 것, 잘 쓰다가 망가진 것을 채워넣기로 했다. 알뜰살뜰한 여행자의 자세도 중요하지만 사소한 것들 때문에 자꾸 신경을 긁느니 확 질러버리는 게 낫다. 가끔은 흥정해보기도 하고, 외면하고 나서기도 하면서 득템!
아르마스 광장에서 한 블럭씩 지름을 넓혀 돌아다니자, 관광의 중심보다는 그들의 시내다운 모습이 펼쳐진다. 안경점, 빵집, 서점, 화구상. 상가속으로 들어가보면 시계수리점이나 기타 교습소도 보인다. ㅁ자로 생긴 건물 구조는 바깥에서 보이는 것보다 안쪽에 더 많은 것이 있다는 걸 뜻한다. 젊은이들의 아지트, 한적한 펍, 그리고 왠지 그리운 인쇄기 돌아가는 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추어본다.
 도중에 눈에 띄는 가게가 있어 들어가보았다. 뭐지? 이 골목에 어울리는 듯 안 어울리는 듯한 단아함은. 오밀조밀 아기자기한 소품은 물론, 그림, 옷, 거기다가 복층의 인테리어! 살펴보니 미키 나츠키? 라는 일본작가의 가게인 게 아닌가. 직접 쓴 "쿠스코 일기", "여름의 동면"이라는 작품집도 있다. 누군지 쿠스코에 반한 사람인가. 나를 끌어당긴 게 또 일본풍 디자인이라는 데 조금 씁쓸한 듯 겸연쩍은 듯 웃으면서 그래도 기쁘게 사진을 찍고 직접 그린 쿠스코 시내지도를 한 장 샀다.
 다른 길에서는 히피풍의 가게도 발견했다. 밝은 노란색으로 벽을 칠하고, 물담배를 피우고 악기를 연주하는, 자유로운 바람과 같은 분위기. 점원의 스타일과 웃음에는 만족감이 있었다.

 이렇듯 알려준 대로 정해진 대로 찾아가는 것보다는 살랑살랑 마음 가는 대로 걷다가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쨌거나 이 도시에서의 피날레를 카페 라이프로 마무리해야만 했던 나는(왜?) 약간의 위험을 무릅쓰고 전에 찜해뒀던 곳으로 살금살금 향했으나(그럴 만한 금전적 이유가 있었음 ㅎ) 확장이전휴업중이라고 ㅠㅠ 몇 군데 살피다가 결국 책자에 소개된 Inca...fe로 향했다. 어찌 보면 터무니없는 가격이었지만 누가 지금의 나를 막을쏘냐. 카페모카, 그리고 아레키파 명물이라는 치즈 아이스를 시켜놓고 한가로이 엽서를 쓰는 시간. 코코넛과 계피라는 흔치 않은 내 편식 리스트 품목마저 어울리게 하는 죽도록 진하고 단 케소 엘라도. 그런데 왜 이 동네 카페모카는 죄다 걸죽한 거야?! 커피 때문인지 모카 때문인지 다음 번에 확인해봐야겠다. 아아, 여튼 간만에 화끈하게 질러주니 좋구나! 단 것과 카페타임, 최고다.

서둘러 엽서를 부치고 약속장소로 뛰어간다. 이제 이 고산도시에서 지도를 안 보고 뛸 수도 있구나! 5분 정도 늦게 도착하자 궁상은 하릴 없이 1시간 반이나 그곳에서 덜덜 떨며 기다렸다고 한다. 과연 궁상 아니랄까봐. 통합입장권의 마지막은 민속 춤 공연. 완성도가 뛰어나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우리에게 우리의 가락이 흥이 나듯 그들의 신명을 울리는 소리와 동작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도중에 관객들이 무대로 올라와 춤을 출 때는 박수로 대신 그들과 함께 했다. 아아, 쿠스코의 마지막 이 하루는 보너스로 얻은 것이었지만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구나. 광속으로 야간버스를 탈 준비를 하는데 궁상은 여전히 우물쭈물이고 내가 더 챙겨야 해도 마냥 좋은 기분을 방해할 수는 없다. 이대로, 하늘과 물을 보러 티티카카로 가자.

by kisa | 2009/01/14 01:56 | I remember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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