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1월 07일
[물빛사막으로] 액운
"경찰청에서 신원조회가 안 떨어지네요."
"...네?"
나는 최대한의 예의를 갖춘 어투로, 최대한의 경악을 표현했길 바라며 반문했다.
상대는 내가 만나본 중의 가장 무기력하면서도 고약한 까칠함으로 무장해 있는 공무원이었던 것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면서, 문장 뒤에 감춰진 "그럴 리가 없어요" "다시 한 번 확인해보긴 하셨나요" "제가 범죄자처럼 보이기라도 한단 말인가요" 등등을 읽어내길 바라는 눈빛을 쏘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녀가 준비한 대답은 한 가지, 신원조회 응답이 없다, 단수여권은 못 내준다, 칠레까지 갈 수 있는 여행증명서를 주겠다, 받을래 말래.
그럼 뭐, 내 선택지가 두 가지라도 된단 말이냐.
젠장, 내 꿈은 9년째 사용중인 이 여권을 올해까지 꽉 채워 사용해서 도장 찍을 빈틈이 없게 만들어 장렬히 은퇴시켜주는 것이었다. 민둥눈썹 사진이 창피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간 참 잘 사용해온 여권이었다. 토론토 공항에서 신원증명부분이 덜렁거리고 있는 걸 발견하기 전까지는.
바로 전날에도 문제 없이 검사 받았던 여권이 왜 돌연 1cm쯤을 남기고 찢어져 있는지 내 '굴-불행성' 상상력을 동원해도 '누군가 악을 품고 잡아뜯었다'는 조악한 장면밖에는 떠오리지 않는다. 금요일 밤에 도착하는 바람에 2일을 넘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대사관에 도착해, 하루면 다수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얼마나 의기양양해서 행복한 하루를 보냈는지 모른다. Reg는 아끼는 온 종류의 펜이 가득한 필통이 없어지고, 에버런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밧데리 접합부가 부서지고, 여권이 찢어져서 새로 발급받는 세 가지 불운이 지나갔으니 이제 모든 게 괜찮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아직 마지막 한 가지는 끝나지 않은 것이었다.
서울-토론토를 거쳐 우여곡절 끝에 장만해둔 사진도 거부당해, 즉석에서 찍은 우스꽝스런 증명사진이 붙은 여행증명서를 받아들고 나왔다.(즉석사진부스에 들어가 앉았더니, 한 편에는 카메라가 아닌 자기 손에 부서질 것 같이 작은 카메라를 들고 있는 뚱뚱한 페루비안 아저씨가 웃고 서 있었다)("창밖을 보면 갈색 건물 하나밖에 없잖아요"라며 사진소를 설명하던 공무원 아가씨를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린다)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온천탕 배수구에 허벅지가 빨렸을 때부터 액땜이 어쩌고 했는데, 이건 땜질의 수준이 아닌가보다. 어디 크게 구멍이 뚫렸거나, 그냥 아예 운이 바닥이 났나보다.
쉽게 그러듯이 어디 가서 10초만 크게 울었으면 좋겠다 생각하는데, 택시에서 내리려 보니 지갑이 없다!! 혼비백산, 절망의 구렁텅이가 저기 번쩍하는가 싶은 순간 좌석과 문 사이에 떨어져 있는 걸 발견하고 정말이지 감사를 외쳤다. 정신을 놓으면 안 돼. 더 나쁜 일이 생기지 않아 다행이다. 내가 점점 조심성이 없어져 당하는 일이 더 많잖아.
운을 탓하거나 기대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아직 내가 일구어 나가야 할 여행길이 길고 길다.
# by | 2009/01/07 11:29 | I remember | 트랙백 | 덧글(8)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좋은 일
신나는 일만 가득할거야
힘내라!!!!
여행기는 챙겨 읽고 있을께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