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사막으로] 요 아마르 바랑코, 이 뚜?

원래 깊게 잘 자는 체질은 아니다. 하지만 6명이 빼곡히 누운 방에서, 내가 조금이라도 뒤척이면 아래 침대에 있는 사람이 깨는 그런 상황에서는 더욱 쉽지 않다. 눈이 떠질 때마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그래도 몇 시간은 잤음에 안도하다 일어난다. 억지로 더 자둘 필요도 없으니. 보통은 Reg(레지)가 샤워를 끝내면 내가 들어간다. 내게는 조금 미진한 더운 물로 샤워를 하고, 다른 이들을 깨우지 않으려 조심해 나오면 아무도 없는 아침식사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언제나 빵 두 쪽, 바나나 하나, 마가린과 딸기 쨈, 그리고 인스턴트 커피. 사실 유명 호스텔의 아침치고는 조금 부실한 편이다. 그래도 설탕을 잔뜩 넣은 커피로 몸을 깨운다. 씻을 필요도, 깎을 필요도 없어 선택되었을 법한 바나나는 여행지의 화장실 고민도 덜어주니 일석이조(풉).

방안의 젊은(?) Party folks와는 다른 시간대덕에 친해진 나와 Reg. 그는 걷는 게 좋다는 유쾌한 노장이다.

따라붙어서 함께한 첫날은 나의 미욱함으로 5mm 밑창의 샌들을 신고 6시간을 걸어다닌 탓에 무릎과 고관절이 나가버렸다. 게다가 내 색연필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데려간 Craft market은 완전히 관광객 대상으로 '공산화된 수공예품'을 파는 '전통 대형마트'였고 재료점은 있을 분위기도 아니었다. 돌아오는 길에 미라플로레스 바다를 조금만 보고 택시를 타자던 내 말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저 고속도로 진입지점만 지나면 바로 home이야"라던 Reg의 말도 어폐가 심했다. 뭐, 어찌됐건 내가 따라나선 거니 속으로 아무리 후회해봤자 소용이 없지 않은가.

오히려, '나 어차피 대사관 가느라 택시 탈 건데 나눠타실라우?'해서 가볍게 시작된 둘째날은 흥미진진했다. 삽질도 씹을거리로 만드니 즐겁기만 하고, 모든 가이드북에서 '비추'하는 micro bus를 잡아타고도 불안하지 않고 "어디로든 가서 또 내려서 또 타면 되지!"싶은 기분이다. 전날은 Reg가 밟았던 길을 따라 갔지만 이 날은 지도를 든 내가 가이드다. 일단 리마의 중심, 5월 광장(아르마스 광장)부터 찍고 시작한다. 남미의 모든 아르마스 광장에서 해보이겠다는 나의 야심 포즈를 Reg가 찍어준다.

센트로보다 안전하고 여유 있고 새롭다던 미라플로레스의 Pizza hut KFC McDonalds Dunkin Donuts MNG 가득한 모습에 완전히 실망했던 우리는 오히려 센트로의 모습에 반했다. 문을 연 채 달리면서 호객하는 차장이 타고 있는 시내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충무로 같은 인쇄 거리를 지나 역사 지구에 도착했다. 학생 입장료 $1도 안 하는 무너져내릴 법한 산 프란시스코 성당은 노틀담 드 파리보다 훨씬 감동적이었고 안경점 거리를 거쳐간 중앙시장도 파티 용품 전문점 등 가지각색 모습이 완전 흥미진진! 조금 무리해서 걸어간 차이나 타운에서 먹은 7.5솔짜리 점심메뉴는 내가 한국 떠나 먹은 음식 중에선 내가 간밤에 만든 모짜렐라 스파게티 다음으로 감동이었다.(그 병 소스가 좀 맛있긴 했다) Reg가 쏜 샛노란색 INCA COLA는 크림소다 맛이라 좀 입맛 베린 느낌이었지만(난 천연 사이다도 안 좋아한다) 센트로를 헤매고 다닐 에너지는 되었다.
지도를 들었지만 '좀' 방향치라 원래 목표인 대학 대신 산 마르틴 광장을 거치며 "원래 휴가 때 계획따윈 없는 거야!"라는 Reg의 말만 보증수표로 쥔 채 마구 걷다보니 거대한 공원에 도착했다. 이곳은 원래 국립미술관이 유명할 테지만 이 옆에는 '문화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나무, 꽃, 파빌리온이 너무나 아름다운 공원과 노천극장, 연못, 자그마한 조류 동물원까지 붙어 있다. 24시간 안에 많은 것을 끼워 넣어야 하는 일상을 살았던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취미인 멍하니 있기. 파리처럼 광합성을 하기 위해서가 아님이 분명할 텐데, 친구고 연인이고 가족이고, 모두 나와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다고 납득할 정도로.

돌아오는 길도 1솔짜리버스 두 번으로 해결하고(택시는 10솔이 넘는다) 하이 파이브로 자축하는 캐나다 남자(55세)와 한국 여자(27세)! 들어오는 길, 대형마트 Metro에서 저녁거리와 페피노 멜론이라는 진기한 과일을 사들고 세탁물을 찾아 집에 도착한다. 냉장고에 남은 것들을 그러모으고, 한 사람 두 사람 모여들어 푸짐해지는 식탁. 바다바람이 살랑 넘어오고 꽃잎이 떨어지는 테라스에서 포크소리와 웃음소리.
남미, 페루, 리마, 바랑코의 밤.

by kisa | 2009/01/06 12:23 | I remember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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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달그림자 at 2009/01/07 11:32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건강 조심하고. 발은 괜찮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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