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생각] 맨홀의 비유

평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잘 걸어다니곤 하지만 바닥에는 하수도로 깊게 뚫린 맨홀이 있다. 굳게 닫힌 뚜껑 위로 무심하게 앞을 보기도 하고 하늘을 보기도 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땅을 보기도 하고. 그러다 어느 순간 예고 없이 쑥 맨홀 속으로 빠져버린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나는 무엇을 하고 싶지?" "나는 왜 살지?"라는 본연의 고민.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쳐도 어느 순간 그 깊고 검은 물 속에 첨벙이고 있는 내가 있다. 어떨 때는 벗어나려고 외면하려고 갖은 애를 쓰고, 어떨 때는 이런, 또 들어와 있군, 하고 체념한다. 스스로에게 어떤 물음을 던지고 과거를 돌이켜 보고 미래를 상상해 보아도 항상 끝은 똑같다. 답은 없다는 것. 주변은 그저 검은 물과, 악취가 가득한 구멍의 벽뿐이다. 구멍은 너무나 작아서 누군가의 구조를 기다릴 수도 없고 도구를 쓸 수도 없다. 한숨을 한 번 푹 내쉬고, 스스로의 팔로 기어올라오는 수밖에. 혹은 그 검은 물이 가득 차고 넘쳐흘러 위로 떠오르는 순간까지 힘을 빼고 있는 수밖에. 우리의 일상에는 그 바닥에는 항상 검은 구멍이 숨어 있다. 그것을 얼마나 깊게 인식하고 지내는지는 스스로에게 달린 것이다. 머리 위로 비치는 햇살이 약한 날이면 주저 앉아 있는다. 그 빛이 강할 때는, 어? 빠졌네? 하고 금방 툭툭 털고 일어선다. 어쨌거나 나는 지금 여기에 있는걸. 내가 오늘 하는 일과 내일 하는 일이 바뀌지 않는걸. 바꾸려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걸, 하고. 길에 구멍이 있건 울퉁불퉁하건 끊겨 있지는 않으니까. 오늘도 계속해서 걸어가는 것이다.

by kisa | 2008/09/07 00:38 | I reckon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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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mandoo at 2008/09/07 02:07
네 일기를 보면 가끔, 일기가 참 중요하다는 걸 느낀다오.

뭔가 글을 써내면서 훌훌 터는 느낌도 들고
일기를 쓰면서 머릿속에서 종횡무진하는 생각들을 잠재우는 것 같기도 하달까.

오뚜기가 되어서 넘어져도 발딱 일어서야지,
그렇지 않으면 바닥이 너무 편해져버려서 못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걸어나가면서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여유만 있다면 한 두번 맨홀 속으로 빠져도 나올 수 있을거야. 힘내:)
Commented by kisa at 2008/09/08 00:47
대나무밭인가.(웃음)
머릿속에서 굴리면 자꾸 반복되고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을 뿐인 생각들이, 문장으로 옮겨 놓으면 그 무게를 더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보이지 않던 길을 열어주는 것 같기도 해.
그런 글을 읽어주고 생각해주는 네게도 정말 고마워 하고 있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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