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6월 24일
[이런생각] 좋아하는 건 속일 수 없다, 팔 수 없다

한때 내게 그건 "만화"였다. 만화가는 진지하게 꿈꿀 수 있는 과대평가 능력이 모자랐고, 정말로 만화편집 일을 하고 싶었다. 난 휴학을 하면서 만화편집부에서 일한 게 아니라, 만화편집부에서 일하기 위해, 부모님과 한 달간 말을 안 섞는 반대를 겪으며, 휴학했다. 현재 학산에서 일하시는 한 분은 내게 진정으로 하고 싶다면 제대로 졸업을 하는 게 먼저다, 라고 말씀하셨지만, 내게 이 경험은 컸고, 덕분에 어시스턴트의 입장에서도 그 세계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겪어보지도 않은 채 꿈을 꾸고 미련을 갖는 건 어리석은 일이 될 수 있어, 난 내 눈으로 직접 봤으니 원한다면 언제든지 뛰어들 수 있다"는 결론을 얻고 나왔다. 내게 만화편집은 아무리 박봉이고 얼마나 밤샘을 하든 열정으로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선택지를 넓혀보자는 시도에 따라 졸업예정자만이 할 수 있는 공채 시장에 출사표를 던져보았고, HR이라는 분야를 새로 발견했던 것이다. (입사 후 1년 반 동안은 일주일에 한 번씩 모 출판사의 채용공고란을 확인했다는 건 스스로를 위한 변명으로 남겨두자.)
좋아하는 일이란 아무리 불씨가 꺼진 듯 싶어도 모래 밑에서 열기를 품고 있는 것으로, 난 원고하는 것보다 책 기획하는 걸 더 좋아하며 동인계에서도 편집일을 했다. (슬레이어즈존의 린젤북도, 귀도, 시화집도, 내 원고는 꼴랑 일러스트 두 장이다;) 청춘28열차도, 원고도 원고지만 책의 컨셉이 좋아 만들었는지 모른다. 여튼 그렇게 약하지만 질기게 이어져 온 애정 덕택인가, 인연도 이어졌다. 우리 멤버가 시공사에서 함께 있었던 모 팀장님과 "모씨모사이드의 연모겔"에서 아는 사이일 줄이야. 그렇게 5년 만에 만나 나는 블라블라 이후로 다시 보여주기 위한 만화리뷰를 쓰는 즐거운 일에 참여하게 되었다.
회사에 안 나가니 시간이 남아 다시 손이 근질근질해졌다. 비툴 커뮤니티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밤에 달리기엔 허리가 아팠; 그 와중에 비툴의 창작방식에 매료되어 내게 모종의 만화편집자로서의 근성이 근질근질해졌던 것이다. 좋아하는 일에 대한 열정으로 무작정 대화를 나눠보고 싶어 편집부 모팀장님께 말을 걸었을 때 이 부탁을 받게 되었다. 영어도 좀 하고 국문과니까, 한번 살펴봐 달라. 처음으로 접하는 DC코믹스의 그래픽노블, <왓치맨>이었다.
"재미있는 만화 읽고 싶다고 절규를 하더니, 잘 됐네." 내가 교정 작업을 마치고 열광하며 모팀장님과 다시 만났을 때 그분이 던지신 말이다. <왓치맨>은 정말 소름 돋는 명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하지만 그렇지 않았어도 너무나, 나는 즐거워 했을 것이다.
출력된 원고와 책 원본을 받아 햇살이 잘 드는 카페에 앉아 대사를 한 줄 한 줄 살폈다. 처음 보는 단어도 너무 많아 핸드폰 밧데리가 나갔고, 전쟁이나 정치나 미국문화는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그러나 그 한 줄 한 줄에서 작가의 의도가 느껴졌고, 뒷골목 분위기가 물씬 풍겨왔다. 마침표 하나 띄어쓰기 하나 잘못된 것을 찾는 것도 재밌었고, 미묘한 말장난을 우리말에 맞게 수정하는 것도 즐거웠다. 고유명사에서 번역가는 알고 있는 걸 나는 모르는 게 있었고, 내가 알고 있는 걸 번역가는 모르는 것도 있었다. 틀린 부분은 분홍색 펜으로, 이왕이면 고쳤으면 하는 부분은 하늘색 펜으로 표시했다. 혹시나 빠뜨리지 않도록 페이지별로 번호도 매겨 보기 편하게 해주었다.
나는 언어 대 언어의 완벽한 번역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어차피 언어를 갈아타는 거면 온전히 그 언어에 맞게 의역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싫으면 그냥 원어로 읽으삼! 주의랄까. 그러나 <왓치맨>은 그 말투나 표현 하나하나를 살리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 아무리 딱딱해도 직역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었다. (그럴 경우 사실, 직역한 문장을 영어로 번역해서 이해하는 수가 생기긴 한다;) 그런 문장들을 몇 백 페이지를 읽다보면, 직역과 의역 사이에서 멀미가 나도록 줄다리기를 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으아, 일단 "오, 하느님!"부터가 도저히 우리말 같지 않지 않냔 말이다! 하지만 이걸 어쩌냐고, 다짜고짜 "맙소사"라든가 "세상에"라든가 바꿔버려도 아쉬움은 마찬가지 아닐까? 그래서 작품의 위대함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직역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절대 돈 한 푼 받지 않고! 의리로 하는 작업임에도, 나는 너무나, 진짜로, 즐거웠다. 연봉과 복리후생과 나름 널럴한 직장의 안온함에서 잊혀졌던 열정이란 불씨가, 다시금 발갛게 타오르는 것을 보았다. 만화도, 교정보는 것도, 식자 위치 비뚤어진 걸 발견하는 것도! 내겐 황홀함이다. 밥을 굶고 밤을 새워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주변 친구들과 모팀장님께 이 얘기를 했을 때, 그들은 내게 말해주었다. 계속하라고, 취미로. 오래 전부터 고민했었던 문제에, 어느 정도 자리를 지킨 답변이었다. 좋아하는 일은 취미로 두는 편이 낫다. 그래야 지치지 않고 그렇게 열광할 수 있으며, 타협해야만 할 때 가슴이 덜 아플 수 있다. 만일 나라도, 내가 중간에서 조정하는 입장이 된다면, 순수하게 한 편에 서서 밀어붙일 수 없겠지. 물론 그런 와중에도 좋아하는 것을 진짜로 프로로서의 길로 일구어낸 노력에 고개를 젓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진심으로 존경한다. 좋은 것도, 힘든 것도 모두 짊어나가겠다는 각오니까. 나는 조금은 철없는 애정으로 고집을 피우고, 투정을 부릴 테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선물로 책을 받았다. 오탈자가 없이 완벽했던 건 아니지만, 교정 후 확인본을 안 봤다는 핑계를 댈 테다 ㅎㅎ 무엇보다, 내게 분홍색으로 하늘색으로 표시했던 거의 모든 부분들이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찼다. 행복했다. 내가 고민하고 고치고 살펴보고 또 고쳤던 그 문장들이, 그 글자의 배열 그대로 인쇄되었다는 감동. 흐뭇함. 이름 한 글자 안 박혀 있어도, 그 문장은, 내 문장이다. 물론 다시 읽었을 때 아 이건 차라리 이렇게 할걸... 하고 후회가 되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충분히 고민했고, 그 정도에도 만족한다. 절대로 번역가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생각은 없지만, 치명적인 실수를 조금 막아낸 것만 해도 진짜 기쁘다 ㅎㅎ (아놔 브레히트 oTL) 이렇게 멋진 작품에 내 손길이 가해졌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영광이다.
다른 보상은 필요없다. 그걸로도 충분하다. 시간이 지나도 좋아하는 마음은 속일 수가 없고, 밝게 타오른다.
내게 배고파도 즐거울 수 있는 무언가가 존재하다는 게, 진짜로 행복하고 감사하다.
# by | 2008/06/24 00:02 | I reckon | 트랙백 | 덧글(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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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하라고, 취미로- 라는 부분에는 별 수 없는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와 동시에 언어 대 언어로 번역을 할 때면 온전히 그 언어에 맞게 의역하는게 낫다고 생각하신다는 부분에 고개가 끄덕끄덕. 정말 좋아하는, 열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직업으로 하기란 정말 어려운가봐요. 아직도 저는, 직장은 안정적이고 적당히 좋은 자리로, 그리고 정말 좋아하는 일은 그 아래로 두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조금 헷갈리지만요.
그러면 지금은? 좋아하는 일, 적성에 맞는 일과 '성역'이 분리되었다고 봐요. 전 HR이라는 분야를 발견해서 행복하고, 워킹 싸이클이나 적당한 노가다 등이 적성에도 잘 맞거든요. 예를 들어 영업을 하라고 하면 못 했겠죠. HR이 좋아해서 업으로 삼을 수 있는 일인 거고, 만화는 기쁜 일만 있었으면 하는 성역인 거죠. 타협이나 상술이 섞이기보단 욕심과 순결이 존재할 수 있는. 삶이 되고, 싫은 부분도 좋은 부분도 모두 짊어지고 갈 수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신 분들이 훨씬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 )
(소곤, 사은님은, 번역을 하시면 좋을 텐데! > _ <)
출판사에서 일하기 위해 휴학을 했던 것처럼 휴직을 하신것은 아닌지....
그정도로 활력있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시고 있는 것 같아 함께 기분이 좋아지네요.
저 역시 언제나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은 직업이 아닌 취미로 남겨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중 하나지만 요즘처럼 직업(?) 때문에 취미활동을 못하는 상황이 되니 딜레마에 빠지게 되네요. ㅋ..부럽삼
음, 그럴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지도? 항상 그렇게 접점을 찾을 수 있도록 운이 좋진 않지만요. 그래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려봐야죠.
회사생활이라는 게 사람을 빛바래게 하고 퍼석퍼석하게 말려버리는 건 불가항력이기에, 그와 반대로 열심히 물을 주고 햇볕을 쪼이는 시도를 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제가 지난 가을 책 내겠다고 주말마다 밖에서 5-6시간씩 손바닥에 손톱 자국 패이도록 그림을 그릴 거란 걸, 2년 전의 제 자신에게 들려주면 말도 안 된다고 못 믿을걸요? ^-^
욕구불만 이었구만 (퍽)
그나저나 한강모임 언제 할까? 주말이면 아무때나 상관없을듯. 평일도 관계없긴 한데 퇴근이 7시라서;
직장인이신 분은 주말이 좋으실 텐데 저는 주말이 가족봉사의 시간이라...
외할머니댁 오버나이트와 주말농장 김매기... oTL
나에겐 그런게 뭔지 모르겠구먼?
너도 늘 뭔가를 찾고 있잖니! 난 항상 너의 반짝반짝함과 행동력을 동경하고 있단다 : )
단지 꿈으로써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로 말이지..
네 말대로 박봉이라던지.. 뭐 그런..-ㅅ-;;
마음속에 사라지지 않는 불씨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느낌.
어떤 경험이든 버릴 것이 하나 없다더니, 결국 과거는 현재의 너를 만드는 거름이되었다는 점에서 또 기쁨.이랄까.
좋은게 좋은 거라고 밥을 먹지 않고 밤을 새도 좋은(이거 대단하군!!) 그런 벅찬 기쁨이 내게도 밀려오는구만;ㅅ;(그나저나 이거 이름이 아예 안뜨는거야; 아니면 너는 볼 수 있는거야;?)
_그래, 과거의 내가 부정할 만한 내가 아니라고 느끼게 해주는 일들이 참 행복한 것 같아.
_너도 원고하면서 못 먹고 밤 샌 적 있지 않니?;;;;
_스킨 고생 끝에; 수정해보았는데 이제 보이려나? 우리 집 컴 두 대에서는 다 보이거든!! 오늘 낮에 다른 컴으로 보니 안 보이는 걸 확인하긴 했는데 ;ㅁ;
직업을 좋아하는 일로 만든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건 양날의 검인 듯해요. 운이 좋아서 하고 싶었던 일을 직업으로 잡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싫어지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거든요. 돈이, 명예가, 체면이, 관계가 조금씩 발목을 잡아간다는 느낌? 어찌 보면 철없는 투정일지도 모르지만요 - 아직 시작한 지 1년 반 정도밖에 안 지났고요.
'적성에 맞는 일'과 '성역'에 대해 적어두신 부분에 동감합니다. 제게도 아직 어떤 부분은 '성역'으로 남아 있어요. 더럽히고 싶지 않고, 고집을 굽히고 싶지 않고, 고이고이 키워가고 싶은 일들 말이죠.
글 전체가, 삶이 반짝반짝 빛나 보여서 읽으며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사실 이 얘길 하고 싶었는데 서론이 심하게 길어졌네요; 늘 이 글처럼, 행복하셨으면 합니다.
지금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마감"과 "교정지"를 보아하니 살짝 친숙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데.. (스톡힝을 하지 말고 직접 여쭈어야 하는 것을!)
좋아하는 일에 변명이 붙어야 하고 타협이 걸쳐져야 하고 그렇게 되면 힘든 점이 있죠. (보험 파는 곳도 마찬가지여요!) '누구나 다 그래'라고 하면서 누군가 겪는 상황을 투정이라고 부르는 건, 아니잖아요 : ) 어쨌거나 몸을 던져 마주하고 있는데. 힘든 일도, 좋은 일도 받아들여야겠죠.
스스로가 '일'과 '성역'을 구분하는 잣대를 갖게 된다면, 그걸 들고 이따금씩 내가 어디쯤 와 있나 재보면 되지 않을까요 : )
혹여 다시 답글을 보러 오신다면, 최근 숙대 근처에도 자주 가는 참에, 재인님과 함께 뵐 수 있으면 어떨까 해요. 진짜로. 덧글이나, 메신저로 뵙길 기대할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