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생각] 욕망과 행동의 상대성이론 혹은 반동의 법칙

"마감 때 가장 많은 일을 한다-"
-란 말로 쉽게 납득하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아마도 그건 우리 만화쟁이들 사이에서만 알아듣는 격언일지 모르니(과연 격언일까) 다르게 설명해보도록 하자.
레포트가 다음날 9시 마감인데 새벽 3시부터 시작하는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는 역설적인 인간이란 설명과
하기 싫은 게 한 가지가 있으면 다른 것들이 너무나 하고 싶어진다는 설명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 중에는 월급쟁이로서, 학생으로서, 가족구성원으로서 부과된 임무도 포함되어 있지만
가끔은 스스로가 정했거나 좋아해 마지 않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
매일 스트레칭을 하고 싶다든가, 신문을 보겠다든가, 영어단어를 외우겠다든가.
이런 것들은 행위의 결과물로 얻을 것만을 목적으로 했기에 과정 자체는 즐겁지 않은 것이라고 치부해두자.
그러면 친구를 만나고 싶다거나, 영화를 보고 싶다거나,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거나, 소설을 쓰고 싶다거나 하는 일들은 어떨까?
분명히 하고 싶은데, 안 하고 싶어지는 것들.
그것들은 눈 앞에 주어진 선택지 중 지금 당장에 더 편하고 쉬운 쪽으로 손이 가기 때문일까.
밖에 나가기보단 집에서 뒹굴고, 그림을 그리기보단 만화책을 보고, 소설을 읽기보단 TV를 보고, 밥을 차려먹기보단 굶고(!).

미리 해두고 놀면 좋을 텐데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을 끙끙대며 끌어안고 있다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못하는 걸까?
분명히 욕망하고 있는데도 행동하지 못하는 반어적인 면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단지 게으름 때문인가?

명쾌한 답을 얻지 못한 채 몇십 년(!) 살아가는 동안에도 적응행동과 요령이란 건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래, 어차피 발등이 타들어갈 때까지 안 할 거 다 안다!
괜히 걱정고민하지 말고 그때까지 확 놀아버리자!
스스로 마지노선을 어림짐작해두고, 그때까지는 평소보다 더 많은 놀거리를 찾는 것이다.
고등학교 시험기간에 야자할 때는 오전에 시험이 끝난 후 일단 만화책을 각자 몇 권씩 빌려오고 오락실에서 땀 좀 흘린 다음 들어오는 게 당연한 순차였다.
괜히 하기 싫어~ 몸을 비비 꼬면서 기운을 빼버리는 것보다 훨씬 낫다.

해야할 일이 복잡다단하게 많아진 월급쟁이 생활에서는 이 이론의 심화방편도 개발되었다.
어떤 큰 일이 너무너무 하기 싫을 때는, 그때까지 하기 싫어서 밀려 있던 작은 일들을 리스트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쫙쫙 해치우게 된 것이다.
그 싫은 걸 하느니 차라리 이걸 하지- 하면서 하다보면 어느새 책상까지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맞다, 학교 시험때도 늘 책상정리를 먼저 하곤 했었는데!)
이런 반동의 에너지는 생각보다 훨씬 강력해서, 아주 긍정적으로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
단, 하기 싫은 큰 일 하나에 대해 신경을 끌 수 있는 윗단계를 클리어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시험 때 갑자기 만화가 술술 그려진다거나, 마감 전날 갑자기 홈페이지 리뉴얼을 하고 싶어진다거나 해서 하룻밤 사이에 역사를 이룩하는 일들이 이런 반동의 법칙으로 이루어지는 거다.

이걸 3단계로 응용하면, 해야 하고 어느 정도 하고는 싶으나 영 의욕이 생기지 않을 때,
인위적으로 다른 하기 싫을 만들어서 눈앞에 두는 시뮬레이션을 채택할 수 있다.
실제로 그런 게 없을 때는, 아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는데, 그래도 그걸 하는 것보다는 이걸 하는 게 낫지, 라는 식으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속이고 독려하도록 하자.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인간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동물이 못 되니까!
너무 생각이 많은 복잡다단한 존재라 오히려 반동의 힘을 이용하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고 보면 그림을 그린다는 것도,
자고로 교과서 여백에 그리거나 노트 아래 감추어가며, 혹은 야자 시간에 숨어 그렸지
한번도 널럴하고 한가한 시간에 쫙 펴놓고 그린 적이 없는 것 같다.
내가 최근에 채운 몇 개의 수첩들은, 간단한 메모를 빼고는 전부 수업시간에 그린 것들이다.

아주 작은 부분부터,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조차, 어째 스스로의 의지로 행동하는 것이 하나 없는지.

나도 이런 습성이 좋지만은 않다.
허나 어쩌겠는가. 그런 건전한 마음가짐과 행동거지가 갖추어지기 전까지 뭔가 하긴 하려면,
스스로의 앞에 궤변이라도 늘어놓는 수밖에.
역설적인 인간이여.
이글루스 가든 - 한평생에 남을 세계여행 떠나기

by kisa | 2008/06/19 23:53 | I reckon | 트랙백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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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kisa at 2008/06/20 00:05
꼭 그래서인 건 아니지만-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었지만 상황이 맞지 않으므로 수정하면 '진짜 그렇긴 한데'- 토요일 마감인 과제를 앞두고 미친 듯이 딴짓 중...
Commented at 2008/06/20 03:26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kisa at 2008/06/21 00:07
진짜 어떤 일을 좋아한다고 했을 때 그 결과만을 좋아하거나 의외로 과정의 일부만을 좋아하거나 하는 경우를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 같아요. (책 낼 때는 원고가 아니라 기획과 편집을 더 좋아한다거나... - _ -;;) 그런 의미에서 나아가면, 과연 어떤 수단으로서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그 자체로서 좋아하는 건지 갈라질 수도 있는 거겠군요. 저는 "시간을 즐겁게 채워나가기 위해서"란 이유만으로도 좋지만요. 요즘 오히려 더 걱정되는 건 사건을 사건 자체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수납된 결과보고서의 형태로 받아들이는 게 아닌가 하는 거랍니다. 하여간에 복잡복잡(끙)
Commented by EnigmaBox at 2008/06/22 00:03
음...사람들은 모두 비슷한가봐요.
저 역시 학교 다닐때 시험은 항상 전날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공부를 했었고,
동아리 전시회 준비를 할때도 전시회를 몇일 앞두고 밤을 새곤했었죠.
그냥 전 '벼락치기를 할때 비로소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으며
그게 집중력을 활용하기에는 더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위안을 삼고 있죠.ㅋㅋ
정말 사람들은 자기 합리화를 위해 여러가지 이유를 늘어놓을 수 밖에 없는 듯..
Commented by kisa at 2008/06/24 00:12
정말 다들 비슷하죠? 막바지가 되면 남겨진 시간만큼 모든 에너지가 응축되는 걸까요? 그래서 집중력이 생기는 걸까?
그러면서도 정말 뭐든 합리화를 하지 않으면 스스로 납득을 못하는 게 인간이라니 아이러니하죠... : )
Commented by mandoo at 2008/06/27 00:24
효율면에서는 벼락치기를 따를 게 없지만-_-;
심신이 피폐해지고.. 아슬아슬한 위험함도 감수해야 된다는 점에서...
미리하는게 역시 제일지만.............

내가 그런 걸 할 수 있으면 이미 내가 아니잖아 라는 기분..-ㅠ-;

미리 미리 할 일을 해두는 사람을 보면 존경을 하는 스스로가 싫어질때도 있지만..ㅠㅠ
뭐랄까, 파이널 스퍼트..라고
달리기도 마지막에 더 에너지 방출!!한다잖아.
우린 그런걸꺼야!(그러나 불확실한 추측형 종결어미?!)
이런식으로 자기합리화하는데 점점 능숙해져만 간다-_-;
Commented by kisa at 2008/06/27 23:46
이미 내가 아니잖아-라니 프하하하 ㅋㅋㅋㅋ
파이널 스퍼트에 젖 먹던 힘을 다 짠 지 너무 오래 돼서 더 이상 암것도 안 나오게 되면 어떠하니;
Commented by 200문장영어 at 2008/07/01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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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kisa at 2008/07/01 18:25
...드디어 이글루스에도 자동투고 광고 등장? "영어단어"란 단어로 검색해서 들어오는 것인가 - 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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