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생각] 여행을 떠나는 것

모독
박완서 지음 / 학고재

박완서님의 티벳, 네팔 여행기.



1년전 크리스마스, 정엽 오라버니로부터 책 두 권을 선물받았다. 당시 굉장한 허탈감에 빠져 있었던 나는 겨울 연휴를 조용히 침잠하며 보내고자 했고 아주 무거운 돌로(웃음) 나니아 연대기 원판 페이퍼백을 한 권 골랐고(역시 중간에 그만두었다) 한 권은 오빠의 추천으로 박완서님의 "모독"이 되었다.
내 아무리 불량한 국문과도였지만 박완서님이 좋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는 되고, 마침 복작거리는 속세보다는 자연에 가까워지는 길을 원했기에 기쁜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었다.

...그런데 책의 마지막까지 읽기까지는 약 1년이 소요되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책머리에 박완서님도 마치 겸손의 말처럼 쓰셨지만 절대로 겸손이 아니었다는 걸 느낄 수 있듯;; 티벳 여행기는 다녀오신 지 한참 지나 어떻게든 끼워맞춘 기색이 역력했단 말이다;
전체적으로 티벳의 중국 편입 이후 원주민과 한족의 격차와 생활상의 변화, 화려한 종교와 극빈한 생활의 대립, 아직도 도시가 아닌 곳에는 따뜻하게 남아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같은 것이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고산병으로 심하게 고생하면서 지낸 날들에 대한 회고에는 여행의 두근거림이나 새 문물에 대한 신선한 충격 같은 건 별로 느껴지지 않았고, 시인이 찍은 사진도 영 화질이 아닌 데다가, 종이질도 뻔떡거려서 나빴단 말이다!! (버럭)

...그래서 잠시 손을 놓은 게 근 1년이 지나, 최근에서야 마지막까지 읽을 수 있었다. 티벳편이 끝나고 네팔편이 나오는데, 여기부터는 여러 차례 다녀오고 쓰셨던 여행기의 "편집본"이라는 것까지 있는 그대로 명시하셨듯이, 좀 더 여행기다운 맛이 나고 기운이 느껴진다. 그 영향인지, 나도 훨씬 네팔이라는 곳을 애써 상상해보게 되고, 그곳의 소리, 그곳의 냄새, 그곳의 하늘을 꿈꾸어보는 것이었다.

입사 2년을 넘기고 3년차에 접어든 요즘, 다시 한번 내가 어디 서 있는지,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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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껏 살아온 각박하고 규격화된 삶과
그 삶을 부둥켜안고 죽자꾸나 건져올린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하나도
안 중요해지면서
문득 행방불명을 꿈꾸게 된다.

오 년이나 십 년쯤 머리를 감지도
빗지도 자르지도 않아
무릎까지 내려온 흰 머리에서
이가 들끓게 되면
설산수도한 도사 자격으로 족할까?

그런 공상은 너무도 즐겁지만
실제의 나와는 극에서 극이기 때문에
한 번도 피워 보지 못한 마리화나의
기운 같은 걸 빈 것처럼
몽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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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비행기를 탄다는 것에 들뜨거나 오늘밤 잘 숙소는 어떤 곳일까 궁금해하던 어린 시절과는 달리, 2003년의 배낭여행 이후 내게 "관광"도 "휴양"도 아닌 "여행"은, 그런 [행방불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물론 의도한 탈선은 탈선이 아니듯, 의도한 행방불명도 행방불명이 아니다. 정해져 있듯, 옭매어 있듯 살아가는 일상에서 어떻게든 벗어나보고 싶어서, 처음으로 마주하는 것들이 가득한 곳에 있어보고 싶어서 떠난다.
그곳에는 정해진 관습도 지켜야만 하는 것도 없다. 나는 '사회속의 나'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인 채로 행동해도 된다. 그렇게 새로운 것을 꽉꽉 눌러담고 있다보면, 어느 샌가 그리움에 젖어들게 된다.

떠난 곳을 그리워하는 마음, 현재 나의 자리를 소중히 하는 마음,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해서. 나는 여행을 계획하고, 여행을 떠나고, 여행을 추억한다.
아직까지 내게 닻을 온전히 올려버리고 떠날 만큼의 배짱은 없다. 뿌리 깊숙이 매달린 채로 연처럼 하늘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떠나가 있을 때도, 돌아온 다음에도 그 순간을 소중히 대할 수 있다면, 무엇이 문제랴 생각한다.

지금의 내가 무언가 "뜨거운 것"을 위해 희생을 감수할 수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꿈? 사랑? 나를 제어한다고 생각하는 여러 가지 변수 중에, 무적의 Joker로 돌변할 수 있던 "좋아하는 일"은 세파에 시들어버렸다. 비록 자신의 의지박약이나 세상과의 타협을 그런 식으로 변명하려는 거라 할지라도 지금의 사실이다.
내게 무엇이 남아 있을까. 진로를 결정하고 생활을 바꾸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게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을 해보았을 때, 그건 "여행"이었다.
대학생 때만큼의 열정이나 필사적인 마음은 없다고 하더라도, 이삼일 놀다오는 것으로 자기만족하는 게 습관이 되어가고 있다고 할지라도, 다녀온 뒤 예전만큼 소중히 추억을 가꿔주지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내가 가장 많이 투자할 각오가 되어 있는 것은 여행.
대학생 때 할 수 있었던 여행을 지금은 할 수 없듯이, 훗날 하지 못할 여행을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내가 1년 뒤 가방을 짊어지고 떠날 수 있다면, 그곳은 어디일까?

일본 종단? 인도? 북유럽? 남아메리카? 유럽? 오스트레일리아?
여러모로 생각해보지만 다시 오지 않을 한 번의 기회를 투자하기에 딱 이거다 싶은 목적지를 정할 수 없었다. 뭐야, 이러다가 덜컥 기회가 주어지면 어쩌려고 그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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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이어 올해도 또 네팔을 다녀왔다.
별 볼일 없는 나라에 무엇하러 그렇게 자주 가느냐고 묻는 사람이 더러 있다.
나는 농담처럼 보약 먹는 대신 가는 여행이라고 말하곤 하지만 아마 진정한 휴식을 위해서일 것이다.
실상 온통 약탈한 것 투성이인 세계 유수의 박물관이나 신자 없는 장려한 성당, 그림엽서하고 똑같이 가꾸어 놓은 전원 풍경에 실컷 질리고 감동하고, 그런 문화를 가진 민족이니 뭐라도 배워야 할 것 같은 압박감으로 그들의 일상적인 언행까지를 흘금흘금 관찰하게 되는 유럽이나 미국 여행이란 얼마나 피곤한가.
그렇다고 만 불 시대의 부를 마음껏 으시대며 남을 마구 얕보거나 가르치려 들지 않으면 무젤제한 쇼핑과 환락을 일삼는 동포들과 하루 몇 번씩 부딪혀야 하는 동남아나 중국 여행이 덜 피곤한 것도 아니다.
무시당할까봐 전전긍긍하기나 무시하기에 급급하기나 피차 편안치 못한 관계이긴 마찬가지다.

네팔 여행은 그런 부담없이 상대방의 문화를 있는 그대로 신기해 하며 인정해 주고 같이 즐길 수가 있어서 좋고, 우리 나라에서는 꿈도 못 꿀 낭비를 와장창 하고 와도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지 않으니 좋다. 트레킹을 하고 나면 책임감과 약속에 얽매인 사람노릇과 공해로 질식할 것 같은 몸과 마음이 당분간은 견딜 수 있는 생기를 회복한 것처럼 느껴져서 또한 좋다.
요새도 뭔가로 벌충을 해주지 않으면 도저히 참아낼 수 없을 것처럼 심신이 바스라졌다고 여겨질 때 떠나야지, 떠나야지 하고 거기서 누가 부르는 것처럼 마음이 달뜨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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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읽은 네팔편의 마지막 부분은 기어코 내 마음을 움직여버리고 말았다.
탈출하지 않는 자유로움이 있는 곳. 자연을 마주할 수 있는 곳. 하늘과 일대일로 닿을 수 있는 곳.
네팔에 가고 싶다.
동선을 잘 짜면 앙코르와트에도 다녀올 수 있을까? 지중해로 건너 가?
아아, 마무리다. 네팔은 시작보다는 마지막에 가야 할 곳이야. 들뜬 마음과 호기심을 꾸역꾸역 진정시키고 나면, 지쳐있는 몸과 마음을 달래러 네팔에 가자. 자유롭게 걸으러.

내 마음속의 지도대로라면 1년, 길지 않은 시간이다. 재정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비축을 잘 하고, 놀이 대신 지도를 펼쳐야지. 일생에 두 번 없을 여행을 만들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다시 한번 여행을 시작했다.

by kisa | 2007/02/13 15:31 | I reckon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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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mandoo at 2007/03/08 22:21
여행, 여우양을 떠올리면 어딘가를 갈 계획을 세우던 모습과
맛있는 음식을 찾아 헤메는 당신으로 결론나곤 하지.
많은 곳을 돌아볼 수 있는 결단력과 용기
때로는 부러워.

조금 빗나가는 이야기지만;
책에 의해 여행을 결심하게 되는 사람들이 많기는 한 모양이야.
여행가이신 우리 이모님의 말씀을 빌리면
"나는 살면서 인도처럼 사기치는 나라는 본 적이 없어.
그런데 류시화라는 시인이 쓴 인도 여행기때문에
한국사람들이 인도에 대한 망상과 기대감에 부풀어서 오더구나.
그런데 그 사람은 시인의 아름다운 감성을 지녔고
배낭여행객들과 달리 좀 더 돈을 들여 편히 올 여유가 되는 사람이지.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그 사람과 같은 감성으로 여행지를 느낄 수 없는데
인도에 온 수 많은 한국사람이 다들 헛된 기대를 하고 오는 점에서
여행에 대한 책이 얼마나 도움이 되면서도 위험한지를 알았지."
라시더군..

물론 사람마다 다르다,는 말이지만..
그런 말을 들어서인지..
왠지-ㅅ- 여행관련 책을 꺼리게 된 나는.......
여행은 안다니고 있지만 말이야;ㅋㅋ

그래도 기회가 되면
가보고 싶은 나라들은 많고
내 나라가 아닌 나라를 가면 어떤 형태로든 기대하지 않을까?
뭔가 다를거라고.

뭐, 조금 빗나갔다가 엄청 빗나가버린 얘기네;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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