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가일기] 조금은 나아진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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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에 전화 상담을 가벼운 마음으로 마치고,
4신가 병원 진료를 앞두고 2시에 준이 담임쌤과의 정기상담이 있었는데,
와르르.
말이 비수가 되어 꽂힌다는 게 이런 것일까.
퉁퉁 부어 주체하지 못하게 눈물 흘리는 얼굴을 본 의사쌤이 기겁하시고.
이때가 병가를 결심했던 때였다.
500문항이 넘는 질문지를 작성해갔더니 최소 2개월이라시던 선생님이 3개월을 부르셨다.
급여도 해야 하고 어쿠루얼도 해야 하고… 10월 연휴 후 복귀를 생각하고 3주만 일단 쉬기로 했는데.

3주로 기약한 병가 기간동안 나는 쫓기는 느낌을 받았다.
빨리 나아야지, 부담 갖지 말아야지, 편안히만 있어야지, 괜찮아져야만 하는데…
감정적으로 다운되고 우울해지는 시간은 참 많이 줄어들었지만
압력 하에서 심장이 벌렁거리고 목구멍이 죄어 오는 순간이 잦았고, 패턴도 없어 회피하기가 어려웠다.
지금이야 압박을 통제한 채로 지내고 있지만 만일 복귀했을 때
축적했던 에너지가 서서히 고갈되어 다시 번아웃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복귀하는 그 순간 와장창 무너져내릴 것인가 걱정이 됐다.

한 일주일을 어째야 하나 고민하다가 큰 맘을 먹었다.
연장할 수 있을까.
복귀하지 않으면 밀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테지만,
지금 이 순간은 회사 걱정을 할 때가 아니라 나를 최우선으로 둬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두근거리고 두려워했던 것에 비해서, 상사와 대표는 흔쾌히 받아들여줬다.
마지막 오지랖에 가까운 양심을 발휘해서 3개월 풀이 아니라 11월말까지로 타결되었을 때,
너무나 홀가분하고 “날 듯한” 감정을 느꼈다.
훨씬 여유가 생기고, 부담감이 줄고.
원래 복귀 예정이었던 한 주는 여러 일을 처리하느라 근무를 제법 했지만 견뎌낼 수 있었다.
진짜 맥을 탁 놓고, 쉬어도 된다는 기분.

개천절 연휴에 제주도에 갔는데,
3일째 되는 날 문득 깨달았다. 사흘간 한번도 심장 죄임을 느끼지 않았다는 걸.
우와. 진짜 쉬니까 나아지는구나…
서울에 돌아와서 아예 없어지진 않았지만 한 달 전에 비해 확실히 호전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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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노력을 많이 해주었다.
전화도 자주 하고, 집에서도 더 많이 움직이고 챙기고, 무엇보다 준이 앞에서 큰소리를 치는 일이 줄었다.
다정함이 느껴지면 나 또한 누워있기만 하는 게 아니라 말로라도 고마움과 다정함을 표현하려 하고 사소한 일도 웃음으로 연결하려 했다.
서로 원하는 걸 밀어붙이지 않고 상냥하게 제안하고 조율하여 결정한다.
참, 요즘 우리 가족이 빠진 숨겨진 유산 숨은 그림 찾기 게임도 자꾸 붙어있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ㅎㅎ
선순환으로 준이도 틱 증상이 사라졌고 훨씬 안정되는 모습을 보여서 내 걱정도 줄었다.
풀배터리 검사든 오은영이든 일단 11월까진 잊어버리련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일은 거의 환자처럼 지낸다.
늦게 일어나고, 밥을 안 먹고, 또 낮잠을 자고…
운동은커녕 억지로 억지로 일어나 커피를 동력 삼아 하루 한 번 정도 바깥 바람을 쐰다.
준이는 거의 이모님께 맡겨둔 채. 멍하니 잠에 취하거나 영상에 빠져들어 사고를 막는다.
잠이 너무 오고 하품이 쩍쩍 나와서 수면제 양을 줄이면 어떨까 선생님께 상담드리고 싶지만,
그렇다고 잠의 질이 나아지지도 않았고, 또 잠이 쏟아질 때면
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몸을 맡기면 잠시는 고민이나 걱정을 내려놓아도 되는구나 하는 안도감에 빠져들어 기꺼이 웅크린다.
저녁이 되면 아 빨리 밤이 와서 불을 꺼버리고 싶다… 하며 전전긍긍 안절부절 못하는 느낌도 들고.

주말이면 확실한 일정을 세워 놀러가거나, 아예 나태하게 늘어져 있거나.
이모님이 가시고 늦잠을 자고 아침식사를 아노플라에서 베이글 배달시켜 먹고, 11시까지 그냥 소파에 늘어져 있으면
그렇게 행복하고 ‘쉬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그런데 평일에 나태하게 있으면 쉬고 있는 느낌이 아니라 ‘이래도 되나’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 ‘까먹은 볼일을 처리해야 하나’ 전전긍긍.
간신히, 간신히 힘을 내어 마음을 다잡고 연락 한 번. 결제 한 가지. 메일 한 개.

****
이전에 회사 사람 푸념을 들어주다가 완전 다크 사이드에 빠졌다고 그랬더니
선생님이 너는 지금 절대 다른 사람 고민 들어줄 상태가 아니다 무조건 끊어라 그러셨다.
어떻게 잘 대화를 중단시키나요 했더니 그런 방법은 없다고, 거짓말이란 게 뻔해도 피하라고.
그래도 나를 지탱해주시는 우리 엄마의 힘듦은 내가 듣는 것만으로도 나눠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회사에서 온갖 스트레스를 유발할 사건도, 나 말고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거 같다고 했더니
상사는 이 사건에서 가장 멀어져야 할 사람이 있다면 너라며 맡지 말라고, 대표한테 부탁하겠다고 하더라.
참으로 감사하더라.
그런데 다음 날 대표가 전화해서 “이걸 어떡하지? 누가 맡지?” 하길래 “넵 대표님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한 나.
우리 대표님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데 이렇게 시간 끌고 신경 쓰이는 일 하나 정도는 해야지…
쉬게 해주시는 게 어딘데…
깔끔하게 회신해서 끝나는 일이라면 업무가 좀 있는 것이 오히려 내게 활력을 주는데.
그런 몇 개의 일들을 둘러싸고 쓰잘데기 없고 복잡하고 화나고 질질 끌고 마무리가 안 되고 혼란의 도가니에 빠지는 일이 너무 많으니까
내가 섣불리 메일함을 못 열게 되는 것이다… 전화도 가려 받고…

*****
지난 번 일기에서 상처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확실히 한 달 전에 비해서는 호전이 된 거 같다고 했다.
어디까지 호전될 것인가. 어디가 내 정상으로 돌아오는 시점일까.
낫고 있다는 감사함이 있지만서도, 아직 병가가 한 달 넘게 남았다는 안도감이 있으면서도,
앞으로 이렇게 호전을 실감할 단계가 많이많이 남은 것 같다는 무력함이 나를 지배한다.

by kisa | 2021/10/18 12:56 | 트랙백 | 덧글(0)

[병가일기] 무엇이 나아진 상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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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도 환부를 눈으로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구멍이 커졌다, 종양이 줄어들었다, 양성이다 악성이다, 덧났다 고름이 찼다....
그래서 치료를 하면 차도가 있는 건지, 약발로 버티고 있는 건지, 멀쩡해 보여도 속은 곪고 있는지,
알 수 있다면 참 좋겠는데.
그러지 못해서 나은 걸로 착각하거나, 문제가 없고 이 정도면 정상으로 돌아왔는데도 겁나서 떨거나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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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가 첫 날 아침부터 누가 그만둬서 사람을 뽑아야 한다는 문자가 왔고, 다른 팀장 전화가 와서 수신거절해버렸다.
노트북을 옷장 깊숙이 넣어버렸다.
둘째 날 저녁에는 누가 최종면접에 합격을 해서 오퍼를 만들라는 연락을 받았다.
내일 해야지, 싶다가도 밤새 일 생각이 난다.
셋째 날 아침 노트북을 꺼내 기초작업을 좀 해놓고, 쌓여 있는 이메일을 제목만 본다.
절대 읽지 말아야지... 했던 다짐이 무색하게 열어보았다.
내 자동회신을 당일 병가로 오인한 듯하여 장기병가라고 고쳐두었다.
이 일도 저 일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마감이 있는 것들이라 조금씩 처리해두면 좋은데...
온 힘을 다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
일 생각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리는 거, 
정말 불안해서 그러는 건지,
커피가 심장을 뛰게 하는 건지.
여튼 확실하게 좋은 상태는 그런 데 신경이 아예 가지 않고 평범하게 생활하는 것이다.

****
너무나 혼자 있고 싶은데 신경 쓸 요소가 많다.
친구가 추천한 게스트하우스도 있는데 거기까지 갔다가 어제처럼 이불 밖으로 안 나올까봐 아깝기도 하고.
현재 아들의 상태가 너무 신경쓰이고. 
이런 거 저런 거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으면 확 해버리는 게 이번 치료의 목적이기도 할 텐데
나는 아무렇게나 움직일 수가 없다.
그런 판단장애와 무기력함이 내 치료의 이유이니까.

by kisa | 2021/09/15 11:14 | I am | 트랙백 | 덧글(0)

[일기] 상상이 되지 않는다

아빌리파이를 두 달 정도..? 먹고 4kg가 쪘더니 선생님이 기겁하면서 빼자고 하셨다.
대신 폭세틴을 늘리고 2주 지나서 유지하고 1주째.

아빌리파이를 뺀 그 다음 날 공교롭게도 그룹PT를 갔는데, 
코치님이 "그런 식으로 한 건 했다고 말하지도 말라"는 말을 듣고 눈물이 핑 돌아버렸다.
땀을 닦는 척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나서 끝나고 드릴 말씀이 있다고 했다.
아무래도 나는, '나는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데 그 노력을 알아주지 않으면' 억울한 기분이 드는 모양이다.
이모님의 '자유부인' 운운 때도 그랬었고.
운동 후 의자에 앉아서 '나는 치료를 받는 중이니 너무 몰아세우는 말은 하지 않아줬으면 좋겠다'고 얘기하면서 울컥했다.
다행히 이해가 있는 분이라 잘 얘기하고 알겠다고 하셨다.

그 날 외에는 제법 안정적인 날들이 흘러갔기에, 
2주 뒤에 이대로 계속하자는 선생님의 말씀에 동의했다.
운동을 나가기만 해도 대단한 거라고 격려해주셔서 고마웠다.

그런데... 2주 업, 2주 다운의 굴곡이 진짜로 계속되는 듯하다.
생리주기와도 연관이 있어보인다.
생리 전에 약간 앙칼져진다든가, 짜증이 더 난다든가 하는 증상은 원래 있었는데,
긴 기간 우울감을 느끼지는 않았었다. 지금의 주기로는 우울이 PMS로 자리잡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고통.
생리통이기도 하고, 허리나 등이 아플 때도 있고, 
뭔가의 고통이 나를 괴롭힐 때 훨씬 더 빨리 우울의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진다.

무기력함.
생각의 폭이 좁아지고, 결정을 하지 못하고 쳇바퀴를 도는 듯한 느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흔쾌히 다음 동작을 하는 자연스러움이 사라져버리는 일상.

블로그를 잠시 접었다.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재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기대가 없었다.
사람들에게 다가가 반응을 하는 것이 힘들었다.
아직 친하지 않은 사람과 친해지려는 노력을 하는 게 진이 빠졌다.
재지 않아도 되는 친구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고 싶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카페에서 질질 짜며 일기를 쓰고 있는 내 상태에 대해서.
어떻게든 생각을 정리하려고 써보려고 한다.
1. 다소 심한 PMS를 겪는 것이며 앞으로도 겪을 것이므로 편하게 생각해보자.
2. 폭세틴이 무기력함을 주는 게 아니라 나쁜 길로 빠지는 걸 막는 건데 폭세틴을 먹고도 이 모양이면 지금 난 처절한 상태다.
3. 약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약을 도움으로 삼고 스스로 건강해질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4. 일단 지금은 다운 2주니, 다음 2주가 어떻게 될지 버텨보자.

나를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하는 건 일뿐이다.
게임도 더 이상 안 하고
기다리면무료 웹툰도 거의 안 보게 되었고
어떤 커피를 떠올려도 만족스럽지 않고
배가 고파 밥을 먹어도 두 술 뜨고나면 더 먹고 싶지 않다.
그런데 찐 살은 안 빠진다.

내 상태를 재는 기준은 
1. 우울증에 대한 생각을 안 한다
2. 재밌게 알차게 살려고 노력해야지라고 생각한다
3. 귀찮고 피곤하다
4. 뭘 해야 할지 생각이 안 나고 결정을 못하겠다. 주저앉는 일이 생긴다.
5. 가능만 하다면 아무것도 안 하고 침대에만 있고 싶다. 난 우울증이라고 여기저기 말하고 힘들다고 하소연하고 싶어진다.
6. 특별한 이유 없이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이 정도인 것 같다. 
오늘은 5와 6 사이.

내년에 휴직을 하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해 좌절감이 크다.
회사 소개를 하기 싫어질 때가 회사를 떠날 때라고 말해왔었는데
이 직장을 포기하기는 싫고 떠나 있고는 싶다. 그렇다고 돈은 안 벌 수는 없다.
내가 그렇게 욕하던 일 안 하는 상사가 된 것 같다.
미지근한 온도에 안주하는...
그래도 육아휴직을 하려면 버텨야 하는데.
새로운 곳에 가서 적응할 에너지도 어차피 없다.
상사도 바뀌는데... 과연 내 상태를 밝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이 된다.

떠나고 싶은데 떠날 수가 없다.
여러 가지로.

by kisa | 2021/08/12 12:15 | I am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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