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안온함

포근함과는 조금 다른 안온함
혀 끝에 닿는 달짝지근한 맛에서 멀어질 수 없는 것처럼
발을 담그고 있는 따뜻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편하기 때문에 오히려 감사한 마음은 적으나
깊이 파묻혀버리는

불도저 같던 가로막은 것들을 불살라버리는 달궈진 쇠망치 같던 그런 치열함이 아닌
슬며시 서너 가지 끈을 조절하며 사뿐사뿐 줄타기 하고 있는
이것도 저것도 놓치기는 싫으나 확 당기지도 못하는
그런 안온함 속에 드러누워 버리는 나
날 취하게 만드는 그대

by kisa | 2010/02/08 23:18 | I am | 트랙백 | 덧글(1)

[일기] 나에게 묻는다

내 생애 이렇게 실수를 많이 저질러서 긴장해본 기간이 없는 듯하다. 사소한 것, 하나, 둘, 셋, 넷, 이게 어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다는 말은 변명이 되지 않는다. 깜빡했든, 착각했든, 놓쳤든, 빼먹었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어났든 간에, 실수는 실수로 나타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실수 외에 마음을 놓아서 생기는 실수도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르던 행동들을 무조건 틀에 가두어 억압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이럴 필요까지는 없잖아"하면서 조금씩 해방시켰던 것이, 무심코 "이 정도는 괜찮지 않아?"하다가 뒤늦은 후회에 들어간다.
'나 원래 이러지 않는 앤데' 상황이 이상하게, 운 나쁘게 돌아가고 있다는 말은 오늘 오전부로 접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업무 스타일을 탓하고, 새로운 환경을 탓하고, 휘몰아친 일을 탓하고, 상대방 성격을 탓했는데, 이 정도까지 똘똘 뭉쳐 총공격을 하면 두 손 두 발 다 들고 납작 엎드리는 수밖에 없다. "어 이상하다 왜 그렇지?"가 아니라 "내가 병신이지 죽을 짓을 했군"이 되는 거다. 임계점을 넘었다는 걸 깨달은 순간 부장님을 붙잡고 회의실에 들어갔다. 일말의 변명 없는 고해. 그녀도 찔끔찔끔 흘리지만 꾹 참고 있는 알맹이를 말로 내게 내뱉고 나면, 조금의 유예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나도 좀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거다.

"네가 나사가 풀린 거 아냐?"라는 말을 들었다. 어리광 부리려던 나는 가슴이 뜨끔했다. 인정하긴 싫지만 그럴 수 있다. 확실히 이를 갈고 피를 말리며 일하던 그 때랑 비교하면. A4용지의 사방 여백까지 따지던 사람 밑에서 일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나는 확실히 나사가 풀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하면, 나는 성공한 것이다. 그렇게 죽자사자 눈에 핏발을 세우고 신경 쓰며 일해서 내가 얻은 건 회복하기 어려운 만성 두통이었다. 눈을 감아도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잊혀지지 않았고 불면의 날들과 부쩍 어두워지는 피부톤이 갈수록 심해졌었다. 사소한 건 좀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DC형에서 D형으로 바뀌어 갔다.
지금의 나는, 내가 원하던 그런 상태가 된 건지도 모른다. 머릿속에 자꾸 담아두는 게 무거워서 메모를 하고는 잊어버린다. 메모를 안 한 건 빼먹는다. 회사를 나오면 회사 일은 잊는다. 오늘의 할 일도 내일로 미뤄둔다. 그런 게 구현된 게 현재 상태가 아닐까? 내가 이 정도 월급 받으면서 이렇게까지 일해야겠느냐고 자기보호적으로 방어하는 것도 분명히 있을 테고, 어차피 내가 해서 내가 바꿀 일이 아니라 시다바리나 하고 있다고 물렁해진 건지도 모른다.

상대가 정말 일을 잘 한다고, 옆에서 많이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불똥이 튀기 시작하자, 슬슬 짜증이 나면서 잘 하긴 하는데, 본받고 싶은 롤 모델까지는 아니라고, 존경심이랄까 경외감이랄까 그런 건 없고 단순히 능숙하고 철저할 뿐이라고 내리눌렀다. 그리고는, 입 닥치고 코 박고 시킨 일이나 미친듯이 잘 해낸 뒤에나 뭐라고 말할 자격이 있겠다고 좌절했다. 오늘도 작정하고 야근을 했지만 내일로 미뤄둔 일은 하많고, 퇴근 직전 뭐를 또 하나 빼먹었다는 걸 깨달아서 내일 아침 당장 그걸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신경이 곤두서 있다. 내일이 지나면 큰일날 뻔한 일이었다. 지난 주에 신경 쓰다가 이번 주에 다른 일만 쳐다보느라 눈 앞에서 관련된 사항이 오고가는데도 내 업무와 관계 없는 일이라고 무심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리스트를 되뇌이지 않아서 그런 식으로 깜빡거리는 일이 늘어났다. 예전에는 A4이면지 한 가득 할일을 써놓고 지워갔는데. 요즘은 다이어리에 글자가 많아지는 게 싫다.

내가 덤벙거림의 대명사가 되다니. 곡할 노릇이다. 난 좀 울어야 된다. 사실, 실제로 건망증도 심하고 덜렁거리기 때문에 오히려 꼼꼼히 챙기려는 습관이 들었다고는 하지만, 내가 최고로 신경 집중해서 일하던 시절에도 실수는 더러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완벽주의자면 완벽주의자였지 '못말리는 덜렁이'는 아니었다. 무언가 실수를 해도 그건 내가 내 일을 좌지우지하는 선에서 대책을 강구하거나 넘어가면 되는 일이었는데, 지금은 행동 하나하나가 평가를 당하니 숨을 뱉을 공간이 없다. 정말이지 면접 때 "전 너무 꼼꼼해서 탈이에요" 따위의 말을 내뱉었다는 페이지를 찢어발겨서 불태우고 싶을 만큼 이곳에서 나는 찍소리를 낼 수가 없다. 얼마 전까지도 '다음에 면접을 보게 되면 실수가 없을 수는 없지만 실수가 있어도 그걸 발견할 수 있는 이중삼중의 장치로 일을 한다 같은 걸 레파토리로 삼으면 어떨까' 구상도 해보았는데 일단 지금 나는 닥치고 셔터 내리고 내부수리 좀 해야 한다.

세상에, 오늘 그들은 내가 B형이라는 소리에 정말 식겁하며 놀라더라.(입사 즈음에 이미 한 번 들은 적 있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그럼 무슨 혈액형이라고 생각하셨냐고 물었더니 입을 모아 "A형!"이라고 했다. 나 정말, 죽여 살았구나 이 사무실에서. 다른 의미로 엄청, 스트레스 받고 있었겠구나. 혈액형별 성격 진단이라는 게 반은 장난이지만 반은 통계학이다. 여태 비아냥거림과 함께 너무나 골수 B형이다라는 얘길 들으면 들었지 A형일 거라는 짐작은 들어본 바가 없다. 막내짓, 납작 엎드림, 벌벌 김, 어벙한 척, 이런 것들이 어느 순간 어디로까지 가버린 것일까. 까마득하다. 나 어디에 있는 걸까.

by kisa | 2010/01/22 01:06 | I am | 트랙백 | 덧글(20)

[일기]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간혹 기억했던 것과 원작이 전혀 다른 경우를 경험한다. 시든, 소설이든, 만화든, 영화든. 내용 자체보다는 맥락속에서 내게 입력되었던 내용이 남는 것이리라.
오늘 난 머리가 조금 굵어졌던, 하지만 아주 어렸던 시절 내 가슴을 후려쳤던 문장이 생각났다.
나는 언제부터 핑계를 찾고 변명을 찾는 데만 급급해졌던 것일까.
땀을 흘려보고나 나서 지쳤다고 말해야 한다.

by kisa | 2010/01/18 23:38 | I am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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